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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빈곤[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김봉성 | 승인 2018.06.08 10:59

[논객닷컴=김봉성] 나이를 먹고 싶다. 굶은 지 오래다. 대학 졸업 이후 26+1살, 26+2살… 26+10살, 26+11살……을 먹었다. 친구들과 이야기가 겹치지 않는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다. 26+1살, 26+2살을 함께 먹던 친구들은 아버지가 되더니 36살, 37살……짜리 형이 되어버렸다.

2년 만인가, 3년 만인가. 꽤 잔인한 인사였다. - 어떻게 지냈어요?

안녕을 물었다면 안녕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도입이 끝났으니 나도 본론을 들을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저 결혼해요, 같은. 구두 청첩장과 마음에 없는 축하를 교환하는 동안 나는 혼자 생각했다. ‘어떻게’는 의외로 집요한 의문사였다. 생각 속에서 의문사(疑問死) 된 나를 발견했다. 후배가 결혼이라는 이야기를 만드는 동안 나는 이야기가 없었다.

©픽사베이

인생은 경험 자아와 이야기 자아로 직조된다. 경험 자아는 순간을 체감한다. 이야기 자아는 경험 자아가 만든 기억을 이야기로 편집한다. 경험 자아와 이야기 자아는 일치하지 않는다. 28분의 내시경과 8분의 내시경 중 8분의 내시경 고통 총량이 적은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고통의 정점을 28분의 내시경에서 14분에 두고, 8분의 내시경은 마지막 한 순간에 둔다면, 이야기 자아는 8분의 내시경을 더 고통스러웠다고 기억한다. 편집된 고통만 개인의 기억이 된다. 결국 성찰되는 ‘나’는 이야기 자아인 것이다. 이야기 된다, 고로 존재한다. - ‘나’의 밀도는 안녕들 하신지?

경험 자아는 안녕하지 못하다. ‘No pain no gain’은 진보의 실천 윤리이고, 우리는 도서관, 직장을 구성하는 진보 중독자들이다. ‘점수가 곧 나’라는 종교 안에서 경험 자아의 말살은 노오오력으로 칭송된다. 그렇게 구축한 이야기 자아 역시 안녕하지 못하다. 대학 가면, 취업 하면, 결혼 하면, 집 사면을 천국처럼 기다렸지만, 내 36살, 37살짜리, 38살짜리 친구들도 나보다 늙어버린 얼굴로 그냥 사는 거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의 위력은 막강하다. 숫자는 이야기의 원초적 동력이다. 시장 사회에서 숫자는 자존감과 거의 비례해서 사람을 만든다. 사람이 사건을 만든다. 그러나 학자금 대출과 저임금으로 사회 초년생의 숫자는 허약한 경우가 많다. 허약하게 시작하면 계속 허약할 수밖에 없는 상태인데 자유경쟁이라 부른다. 밥값과 찻값의 산수에 막혀 인물을 소거해 나간다.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한다. 보편 서사마저 없다. 그런 삶의 무덤 앞에서는 가성비가 세워질 것이다.

자아의 허기가 ‘맛집’과 ‘먹방’을 호명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음식만이 카르페디엠(Carpe diem)인 세상에서 치킨은 칰신이 되었다. 입 안의 신속하고 확실한 행복감으로 공허를 위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음식물은 섭취 후 17시간 정도면 배설된다. 이야기 자아는 끊임 없이 변기 레버를 내린다.

체내 이야기가 빈곤한 시대다. 그래서 유사 이야기를 포도당처럼 주입한다. 만화, 드라마, 예능, 스포츠, 영화 등의 이야기 섭취 비용은 0에 수렴한다. 이야기가 없을 때, 손오공, 김신, 유재석, 이대호, 토니 스타크를 부담 없이 꺼내 먹는다. 시간이 맛있게 채워진다. 내 경우에는 [무한도전]이었다. 첫 회부터 모든 회차를 다 봤다. 2008년에서 2012년 사이 방송은 너덧 번씩 봤다. 짜장면이 먹고 싶을 때, 짜장 라면을 사먹던 시절이었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기억을 가졌다. [무한도전]은 매 회 다른 주제를 채택하기 때문에 모든 촬영이 특집으로 명명되었다. 멤버들은 생계와 이야기가 직통했다. 그들은 매주 하나씩, 2006년 5월부터 2018년 3월까지 563개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나는 내 13년 속에 563개의 명명된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없다. 취업 준비, 취업, 여행, 연애, 기타 카테고리 아래 이름 없는 사소한 것들을 긁어 모으면 100개쯤 되려나. 그것도 자신 없다. 하하는 나보다 몇 살 많을 뿐인데, 그는 벌써 내 고조할아버지만큼 산 것 같다.

이야기의 질도 달랐다. 이야기의 질은 감정의 강렬함으로 결정된다. 2011년 <조정> 특집에서 배가 결승선을 통과하자 정형돈이 울먹이며 외친 “easy oar!”는 다른 세계의 울림 같았다. 나는 내 나이가 멈춘 후, 어느 기억에게도 물기 가득한 울음을 외칠 수 없었다. 희망하지 않으면 절망하지 않는다는 합리적 체념이 몸에 뱄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외로움은 무뎌졌다. 좀 심심하고, 적당히 짜증나고, 간혹 웃었다. 불발된 연애에서 남부럽지 않게 울었지만 <조정> 특집 전이었다.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귀찮아서 연애를 미루다 보니 연애 단절 기간이 10년을 채워간다.

후배의 결혼 소식은 진실의 거울인 셈이었다. 진실은 순무처럼 담백했다. 나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도를 기다리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내 옆에 툭 떨어진 것 같다. - 뭘 할까. 고도를 기다려야지. 지금 고도를 기다리잖아. 심심한데. 여기 앉아. 고도가 올까. 올 거야. 어제도 그랬지. 오늘은 올 거야. 안 오면 목이나 맬까. 재미없어. 우린 할 일이 있어. 무슨 일? 순무를 좀 먹을래? 고도를 기다리자니까. - 맛있는 걸 먹는다고 해서, 취미에 돈을 쓰는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계속 아무 것도 아니어서 롯데의 연패와 어벤저스로 이야기 되는 간접 인간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하지만, 이야기가 없으면 주인공도 없다. 에스티미르(혹은 블라드라공)는 주인공이 아니라 혼자다. 혼자에 중독되어 경험 자아만으로 자존감의 외연을 버티고 있었던 것을 이젠 인정해야겠다. 나이를 먹고 싶다. 맛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유사품 숫자에 주의해야 한다. 배달불가다. 노란 머리 긍정왕이 말했다. 좋아, 가는 거야.

 김봉성

대충 살지만 글은 성실히 쓰겠습니다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논객닷컴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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