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이정숙과 서금영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동요(童謠)는 어린이의 생각과 표현을 담아서 만든 가사와 노래의 조화로운 혼합적 구조물이지요.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깨끗하고 순진무구한 영혼이 그 속에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침탈로 말미암은 시련과 고통에 허덕일 때에 당시 아동문학가들은 숱한 동요를 만들어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 이름도 고결한 소파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선생을 비롯하여, 홍난파, 윤극영, 정순철, 윤복진, 박태준, 윤석중 등 당대 최고의 아동문학가 및 작곡가들이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보급과 확장에 노력했던 일들은 이제 아득한 신화처럼 여겨집니다. 봉건시대에는 어린이란 말조차 없었지요. 그저 개똥이, 돼지, 강아지 따위의 동물명으로 부르고 인권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아동들에게 어린이란 이름을 만들어 부르며, 그들의 존재를 하늘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선각자들의 거룩했던 꿈과 포부를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동요는 1920년대 중반부터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1926년 9월에 발표된 홍재유의 동요음반 ‘할미꼿’ ‘춤추세’가 첫 음반으로 보입니다. 그로부터 1939년 5월까지 약 13년 동안 약 230여종이 넘는 동요음반이 10개의 음반회사에서 제작발매가 되었습니다.

동요라는 부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왕성하게 음반을 발매했던 회사는 단연 리갈레코드사였습니다. 여기서 활동했던 동요가수들은 이정숙, 서금영, 이경숙, 최선숙, 원치승, 강한일, 녹성동요합창단 등입니다. 김복진은 동화 구연 음반을 주로 발표했지요. 리갈에서 활동했던 작사 작곡가로는 윤석중, 선우만년, 송무익, 이정구, 신고송, 윤복진, 홍난파, 원유각, 유기흥, 김성도, 박종선, 강석흥, 박소농, 고호봉, 임원호, 이인숙, 민영성, 손정봉, 원치승, 송찬일, 지상하, 현증순, 정윤희, 한만금, 송완순, 김정임, 지상하, 박천룡, 유기흥, 남궁인, 김여수 등입니다.

두 번째로 동요음반을 많이 제작발매한 곳은 빅타레코드사입니다. 빅타에서 활동했던 가수들은 김연실, 김순임, 윤현향, 강석연, 김정임, 전명희, 송보선, 정경남, 진정희, 계혜련, 신흥동인회 등입니다. 윤백남은 동화구연 음반제작에 참가했습니다. 빅타 소속 작사 작곡가로는 이정구, 모령, 정인섭, 정순철, 최순애, 박태준, 엄흥섭, 안기영, 윤석중, 홍난파와 일본인 중산진평입니다.

세 번째로는 콜럼비아레코드사였고 여기서 활동한 가수로는 이정숙, 채동원, 서금영, 최명숙, 이경숙, 이삼홍 등입니다. 작사 작곡가로는 윤석중, 홍난파, 박태현, 이원수, 방정환, 정순철, 유지영, 윤극영, 한정동, 윤백남 등입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도 아동물 음반을 발매했었는데 동요가수로는 김숙이, 정경남, 고천명, 조현운, 김소희, 전병희, 송보선 등이며, 작사 작곡가로는 박세영, 염석정, 김태오, 원유각, 목일신, 김성칠, 조현운 등이 활동했습니다.

닙본노홍과 같은 일본음반사에서는 홍재유(홍재후), 임건순, 이정숙, 서금영, 이경숙, 최명숙 등이 음반을 발표했고, 작사 작곡가로는 홍난파와 박태준이 전담했습니다. 이글레코드사에서는 서금영, 이경숙, 최명숙이 음반을 내었고, 그들을 위해 김태오, 김신명, 박노춘, 김수경(윤복진), 박수순, 홍난파 등이 작사 작곡을 맡았습니다. 시에론레코드사에서는 강금자, 신카나리아, 임수금의 음반이 보이고, 닛토레코드에서는 이종옥과 이정숙의 음반이 확인이 됩니다. 디어레코드에서는 강금자와 신카나리아의 동요음반도 보입니다. 태평레코드사는 동요음반 제작발매에 가장 소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목록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길귀송의 동요음반 하나만 겨우 확인이 됩니다. 여러 음반사마다 발간했던 동요 곡들의 제작에 참여한 가수와 작사 작곡자 명단을 살펴보면 이름이 겹치는 경우가 자주 발견이 되지요. 그것은 그들의 활동이 보여주는 인기척도나 활동의 적극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정숙의 동요 ‘오빠생각’ 가사지 ©이동순

취입동요음반들을 가수별로 집계를 해보면 누가 가장 최고의 동요가수였었던가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다취입가수는 단연코 50여곡 이상을 음반에 취입한 이정숙(李貞淑)입니다. 그녀는 피아노연주 2곡과 작사 1편까지 포함해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한국근대 최고 동요가수였습니다. 이정숙이 활동했던 음반사로는 주된 터전이었던 콜럼비아, 리갈사를 비롯하여 닙본노홍, 이글, 리갈레코드사 등 여러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이정숙은 한국 근대동요사에서 동요음악을 유성기음반으로 취입하여 전국적인 동요보급 확산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입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정숙의 대표곡 ‘오빠생각’ 전문

이정숙에 이어서 그 다음 위치를 차지하는 2위 동요가수로는 서금영이 16곡, 김숙이가 15곡, 그리고 녹성동요합창단이 12곡, 최선숙이 11곡, 진정희와 이경숙이 9곡, 김순임와 계혜련이 8곡, 강금자가 6곡, 신카나리아와 최명숙이 각각 5곡, 전명희, 이삼흥, 송보선, 신흥동인회가 각각 4곡씩 발표하고 있습니다. 김정임, 고천명, 임수금, 홍재유(홍재후)는 3곡씩, 강석연, 양재익, 이정옥, 길귀송, 정경남, 윤현향이 2곡씩의 동요를 발표했습니다.

이정숙은 리갈과 콜럼비아레코드사의 대표적인 동요가수였고, 그밖에 닙본노홍과 이글, 리갈레코드사에서도 동요곡을 발표했습니다.

한국근대 최고의 동요가수 이정숙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금강키네마와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던 유명영화감독 이구영(李龜永, 1901~1973)의 누이동생이었지요. 무성영화 '낙화유수(落花流水)'를 김영환과 함께 제작했습니다. 이때 삽입곡주제가('강남 달')를 유경에게 부르도록 했는데 이게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자 1929년 7월, 이미 동요가수로 장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이정숙에게 이 노래를 정식으로 취입시키고 무대 위에서 직접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물론 오빠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이정숙은 1927년 5월 닙폰노홍 음반사에서 '이 동리 저 동리'란 동요 곡을 발표했던 어엿한 동요가수였습니다. 윤극영이 조직한 최초의 어린이합창단 ‘다알리아회’가 일본의 닛토레코드 초청으로 우리 동요 17곡을 취입할 때 가장 많은 곡을 취입했던 인기 높은 동요가수이기도 했습니다.

이정숙은 유명작곡가 홍난파로부터 동요창법에 대한 특별지도를 받았습니다. 1926년 7월15일, 경성라디오방송국이 체신국 방송소를 이용해서 전파를 송출할 때 여기에 최승일과 함께 출연해서 유행가 '곤돌라', '푸른 별', '뱃노래' 등을 불렀습니다. 배우 신일선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주제곡도 이정숙이 처음 부른 것으로 증언합니다. 1927년 9월에는 장충단에서 열린 시민위안 추석놀이 음악영화대회에 단성사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요가수 이정숙의 생몰연도를 확인할 자료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빠 이구영의 출생이 1901년이니 막내여동생인 이정숙의 나이를 대충 어림잡아 짐작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이정숙의 마지막 취입음반은 1934년 6월, 리갈에서 내었던 동요 '참새 춤'까지 확인이 됩니다. 1937년 여름, 중앙무대에서 막을 올린 연극 '예수나 안 믿엇더면'(채만식 작) 공연에 아역배우로 출연했던 이름이 보이고, 광복 이후에도 활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1956년 서울방송국 어린이프로에 세 차례 출연해서 동요를 부르거나 피아노연주를 했다는 기사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결혼한 뒤로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고 가정생활에만 충실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동요가수로는 서금영(徐錦榮, 1910∼1934)입니다. 그녀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전당포를 운영하던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1925년 동아일보 신년호에는 서울의 보통학교 재학생 중 장래가 촉망되는 아동 140명을 선발해서 특집을 꾸몄는데, ‘장래의 문학가’에는 교동보통학교의 설정식과 윤석중이 여기에 뽑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자라서 예측대로 명망 높은 시인이 되었습니다. ‘장래의 음악가’에는 동덕여자보통학교의 재학생 서금영이 선발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수재아동의 가정을 소개할 때 ‘창가 잘 하는 아가씨’로 서금영에 대한 취재기사가 실렸습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이정숙이 다녔던 중앙보육학교로 진학했는데 재학시절 이미 이름난 동요가수로 여러 무대에 올랐습니다. 1931년 중앙보육학교 졸업생 명단에 서금영의 이름이 보입니다. 같은 해 이화여전 졸업생 명단에 시인 모윤숙(毛允淑, 1909~1990)의 이름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와 동년배쯤 될 것입니다. 서금영도 이정숙과 마찬가지로 홍난파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창법지도를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1931년 1월 '바닷가에서', '무명초' 등이 취입된 첫 음반을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뒤 1934년 6월 '해바래기', '봉사꼿'까지 내리닫이로 10여곡 이상을 취입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콜럼비아를 주무대로 하면서 리갈, 이글, 닙본노홍 등 여러 레코드사에서 초빙을 받아 다양한 음반들을 발표했지만 그해 여름 장티푸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당시 서금영의 나이는 불과 23세였습니다.

홍난파는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1931년 홍난파의 조카딸 홍옥임이 친구 김용주와 동성애에 빠져서 파트너와 함께 열차에 투신자살한 쇼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끼던 제자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되는 절창 '봉선화'가 빚어졌다고 하는군요. 노래 속의 봉선화는 조카딸 홍옥임이기도 했고, 요절한 제자 서금영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비단물결 남실남실 어깨춤 추고
머리감은 수양버들 거문고 타면
달밤에 소금장이 맴을 돈단다

아가야 나오너라 냇가로 가자
달밤에 딸각딸각 나막신 신고
도랑물 쫄랑쫄랑 달마중 가자

-서금영의 대표곡 '달마중' 전문

우리들의 어린 시절,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숙과 서금영을 비롯한 옛 동요가수들의 노래는 한 세기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두 사람의 음색과 창법을 비교해보면 이정숙은 서금영에 비해 한층 낭랑하고 또랑또랑한 울림으로 펼쳐집니다. 가련함과 애처로운 느낌이 듬뿍 풍겨나는 애수의 정서가 서금영에 비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이에 대조적으로 서금영의 음색과 창법은 나직하고 은은함이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다른 동요가수들의 경우도 두 소녀의 창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대체로 유사한 경우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찍이 이정숙과 서금영이 닦아놓은 동요창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의 억양과 발음법이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정숙, 서금영의 시대와 비교할 때 엄청난 변화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초창기 동요를 들으며 마치 북한가요를 듣는 느낌이 있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합니다. 폭풍 속에 파들파들 떠는 풀잎처럼 애달프고 가녀린 소녀의 창법은 주권상실과 식민지 압제의 뼈아픈 고통을 어금니를 깨물며 지그시 이겨내는 듯한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래를 듣노라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슬프고 처연한 소녀의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한국의 근대시기 가장 대표적인 동요전문작사가로는 윤석중, 김수경(윤복진), 유기흥, 원유각, 윤극영, 김성도, 박세영, 이정구, 유지영, 송완순, 엄흥섭, 한정동, 김태오, 방정환, 최순애, 이원수, 이주홍, 권태응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동요전문작곡가로는 홍난파를 위시하여 윤극영, 박태준, 박태현, 정순철, 김영환, 김신명, 안기영, 원치승, 조현운, 염석정 등과 일본인 중산진평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시대에서 동요음반은 이처럼 가슴속에 쌓인 상처와 울분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민족의 삶에 마치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은 부드럽고 아늑한 사랑과 평화의 분위기로 고단한 마음을 한결 안정시켜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 속에 이정숙과 서금영, 그리고 이름이 아주 묻혀버린 소녀 동요가수들의 애달픈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정정##

위 기사 중 윤석중 선생(아동문학가)의 사진은 임응식 작가의 작품을 허락없이 사용하여 해당 저작권 관리자측(임응식사진아카이브)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기에 해당 사진을 즉시 삭제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