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석회암에서 보랏빛으로 피는 ‘바위용(龍)머리’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Dracocephalum rupestre Hance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국립수목원이 발표한 국가표준식물 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의 수는 모두 4129종. 이중 대다수는 동네 뒷산이나 들, 저수지나 강, 평상시 오고 가는 길의 가장자리 등 우리가 사는 곳 가까이에 있지만, 일부는 높은 산이나 깊은 계곡, 섬이나 강, 바닷가 등 특정한 곳에서만 서식합니다. 이 중 동물 뼈나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만들어진 강원도 석회암 지대는 오랜 세월에 걸친 단층운동과 풍화·침식작용으로 형성된 석회동굴 및 기암절벽 등 천혜의 비경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박쥐나 육서 무척추동물, 특산식물인 동강할미꽃 등 특정 동식물의 피난처, 나아가 최후의 서식처라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탄산칼슘이 풍부한 석회암지대에 잘 적응해 사는 식물들을 호석회 식물(calcicole plants)이라 부르는데, 회양목을 비롯해 꼭지연잎꿩의다리와 아마풀, 개아마, 참골담초, 정선황기, 복사앵도, 시베리아살구나무, 외대으아리, 삼수개미자리, 산서어나무, 왕느릅나무, 나도국수나무, 비슬나무 등의 호석회 식물이 숨겨진 보물처럼 강원도 석회암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연구자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석회암 바위 절벽에 붙어 길이 20~30cm까지 자라서 6월부터 8월 사이 보랏빛 꽃을 층층이 피우는 벌깨풀. 심장형 이파리와 줄기에 흰 털이 촘촘히 나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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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오르며 여름을 향해 치닫는 6월 초·중순, 키 작은 풀꽃이 자취를 감추면서 산과 들의 식물들이 잠시 꽃 피기를 멈춘 채 휴지기에 접어드는 듯싶을 때 강원도 석회암지대의 높고 험준한 산에는 특별한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호석회 식물의 하나인 벌깨풀이 그 주인공입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절벽 한가운데에 뿌리 내린 벌깨풀. 남한에서는 자생지가 몇 안 되는 희귀 북방계 식물로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최선의 보호책을 마련한 듯싶어 안쓰럽지만, 살풍경한 절벽에 최고의 멋을 더한 듯해 고맙기 짝이 없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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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치솟은 덕항산의 석회암 수직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어 보랏빛 꽃 여러 개를, 마치 손가락 펴듯 하늘을 향해 내뻗고 있습니다. 학명 중 속명은 그리스어로 dracon(용)과 cephale(머리)의 합성어인데,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꽃이 마치 상상 속 동물인 용의 머리처럼 보였나 봅니다. 종소명 rupestre는 ‘바위에 자생하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벌깨풀의 특성을 아주 잘 반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오히려 꽃이나 잎 등 전초가 전국의 산과 숲에서 흔히 만나는 벌깨덩굴과 비슷하다고 보고 벌깨풀이란 국명을 붙였는데, 길이는 2.8cm 정도로 입 벌린 뱀 같은 모양의 꽃이 같은 꿀풀과 용머리속 식물인 용머리의 꽃과도 닮았다고 해서 ‘바위용(龍)머리’란 별칭도 함께 얻었습니다.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6월의 연녹색 숲 한가운데서 벌깨풀의 보랏빛 꽃을 바라보면 누구나 자연의 황홀경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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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깨풀은 호석회 식물이자 희귀 북방계 식물의 하나이기도 한데, 이는 곧 현재 확인되고 있는 몇몇 자생지가 곧 북방계 식물인 벌깨풀의 남방 한계 지역으로, 벌깨풀이라는 식물자원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훼손되지 않도록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할 서식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국가생물종정보지식시스템에 따르면 벌깨풀은 중국에도 분포하며, 남한에서는 삼척과 정선, 부안 등 석회암지대 100여 곳 미만의 자생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벌깨풀을 사진에 담아온 야생화 동호인들에 따르면 삼척의 덕항산, 강릉과 정선 경계에 있는 석병산 등 2곳에서 6월과 8월 사이 꽃 핀 것을 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서)

벌깨풀과 벌깨덩굴의 닮은꼴 꽃. 꽃이나 잎이 비슷하게 생겼으나, 벌깨덩굴은 덩굴식물로 줄기가 옆으로 뻗는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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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로지 수직으로 올라가거나 수직으로 내려가는 길밖에 없을 성싶은 등산로를 오른 뒤, 천 길 낭떠러지 중간에 발 딛고 서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받은 채 보랏빛 꽃을 삐쭉삐쭉 내민 벌깨풀을 올려다보며 떠올린 한 구절이었습니다. 솜털 가득한 연둣빛 심장형 이파리를 날개 삼아 하늘로 오르려는 작은 용(龍), 아니 무수한 미꾸라지를 보며 “사람의 손을 피해 이리도 높이 올라왔구나, 더 이상 승천하지 말고 이곳에 영구히 뿌리내려라.”라고 빌었습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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