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의 날아라 고라니]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인천시 서구 가정오거리 일대는 한 때 폐허였다. 지하철역과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 지금은 누가 봐도 살기 좋은 동네지만 재개발이 진행되던 몇 년은 좀비가 나올 법한 음산한 곳이었다. 의무경찰이었던 스물 두 살의 난 매일 밤마다 달빛도 들지 않는 빈 집들을 돌아다니며 노숙자와 우범청소년을 찾아다녔고, 가끔은 쓰레기로 가득한 놀이터에서 몰래 통닭을 뜯기도 했다.

그보다 조금 더 전, 그러니까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 이곳은 우리 할머니네 동네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 가족에게 명절날 여행을 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매년 설이 돌아올 때면 짭짤한 불로소득인 세뱃돈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과 이모, 친척동생들을 볼 생각에 설렜다. 할머니가 집안의 여자 어른들을 이끌고 장을 보러 가면 나를 비롯한 꼬맹이들은 작은아빠를 따라 뒷산에 오르곤 했다. 설에는 약숫물을 떴고, 추석 땐 밤을 주웠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쉽게 들뜨고 설레던, 30분에 500원씩 하던 퐁퐁이(트램폴린) 위에 오를 때면 세상에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픽사베이

군복무를 마치기 전 할머니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가부장적 남편의 전형이었고, 자식들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괴롭히지 않게 평생 당신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왔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자식들의 발걸음은 점차 줄어들었다. 할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화가 난다며 TV 전원코드를 뽑아버렸다. 대신 거실 벽에 가족들의 사진이 하나 둘 붙었다.

작은아빠가 태어나기 전 찍은 흑백 가족사진 속에는 작은아빠의 갓난아깃적 사진이 어색하게 업데이트됐고, 그 옆에는 사남매의 결혼식 사진이 줄지어 자리잡았다. 곧 거실 벽은 손주들 사진으로 가득 찼고, 곳곳에서 할아버지가 손수 그려 넣으신 노루와 토끼들이 뛰어다녔다. 가장 울창하고 커다란 소나무 그림 아래에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놓였다.

열여덟에 월남해 6·25전쟁에 참전한 할아버지는 평생 북한을 증오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비난하며 살았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2개 대대에서 20여명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빗물에 불어 주먹만해진 건빵 덕분에 일주일을 버텼다는 무용담은 할아버지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잘생기고 말 주변 좋은 신사였던 할아버지는 군 전역과 동시에 광주의 부잣집 따님이었던 할머니에게 청혼했다. 할머니 집안은 격렬히 반대했고 두 분은 두 손을 꼭 잡고 야반도주해 인천에서 타지생활을 시작했다. 닭알탕, 짜장면 장사로 돈을 모아 양계장을 열었으나 화재로 모든 것이 불타버렸고, 두 분은 다시 맨몸으로 농사를 시작해 네 자식을 건사했다. 고된 노동은 두 분의 고운 시절을 금방 거두어갔지만, 대신 가족들은 더 이상 배고프지 않게 됐다.

두 분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분들은 이제 거동이 쉽지 않은 연세가 됐다.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들 중 누구 덕분에 너희가 맘 편히 사는 줄 아냐며 난데없이 지하철에서 삿대질을 하거나, 맞불집회에 참여해 “계엄령을 선포하라!”라고 외치는 분들을 보면 경악스러울 때도 많다. 참혹한 시대를 살아가며 조국의 평화와 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한 옛 세대의 공헌에 그저 감사하며 살기엔 우리의 현재는 너무 바쁘다. 또한 우리가 가진 상식이라는 것이 어떤 어르신들께는 죄악시되는 불경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면 서로가 살아온 세상이 너무나 달라 그 간극을 좁히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가족사진을 붙이던 우리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이런 생각도 든다. 군부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가 됐든 “우리 세대가 과거에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라는 상상의 자부심이 됐든 그것이 한 소외된 인간의 영혼에 약간이라도 위로가 되었다면 그 존재가치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 부분만큼은 조금은 고마워할 수 있지 않을까.

직접 전쟁을 겪으며 북한에 대한 증오가 할아버지의 몸뚱이에 박혔듯이,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이미 사남매의 몸을 둘러싼 살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도 그분들 나름대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효도를 한 것 같다. 평생을 품어 온 아집과 독선을 내려놓고 이제 그만 넓은 마음으로 편하게 사시라고 타이르는 대신, 명절이 오면 여전히 전을 굽고 밥을 먹으면서 할아버지의 독설을 다 들어드렸으니까. 평생을 불꽃같은 분노를 품고 살아오신 할아버지에게 평화나 안정은 오히려 불편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할머니네 집은 다시 태어난 도시의 가장 낡은 아파트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모든 것들은 사라지지만, 떠나간 사람은 남은 사람의 추억 속에 오래 남는다. 그러나 아마 지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기에,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참 외로우셨겠다고.
나중에 자식들한테 또 원망 듣고 싶지 않으면 그곳에서는 좋은 남편으로 지내시라고. 

고라니

칼이나 총 말고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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