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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한문단편집’을 읽는 재미[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서동철 | 승인 2018.06.19 11:17

[논객닷컴=서동철]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 생활을 꽤 하면서 책이 많이 쌓였다. 출판 담당 기자를 맡을 때는 일주일만 정리하지 않아도 책은 산을 이루었다. 관심이 가는 분야거나 기사 쓰는데 필요한 책은 적지 않게 사들이기도 했다. 요즘은 이렇게 모은 책들을 하나 둘 내다버리고 있다.

미세먼지 예보가 ‘좋음’을 가리키는 날에도 집안은 책 먼지로 가득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미 생명을 다한 시사물은 당연히 1순위다. 인류 역사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고전인 줄은 알겠는데, 죽기 전에 읽을 가망성은 없어보이는 책까지 과감하게 분리수거함에 넣는다.

그런데 다시 일을 저질렀다.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조한문단편집’을 덜컥 사들인 것이다. 각권이 500쪽 남짓하니 부피도 크고 무게도 많이 나긴다. 어디에 꽃아두며 나중엔 또 어떻게 버리나 하는 걱정도 뒤따랐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학창 시절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갖게 만든 책이라는 감회가 없지 않았다.

한국문학자 이우성과 임형택이 편역한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1973년이다. 두 사람에게 ‘한국문학자’라는 타이틀을 달아놓고 보니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흔히 붙이는 ‘한문학자’라는 직함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한문학이란 한문으로 쓰여진 작품을 포함한 한국문학 전체를 해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지난 2월 나온 개정판이다. ‘왜 이조(李朝)같은 자기비하적 표현을 담은 책 제목을 바꾸지 않느냐’는 목소리도 들은 것 같지만, ‘이제는 그런 정도 이유로는 제목을 바꿀 수 없을 만큼 우리 문화사의 고전이 되었다’는 변호도 가능할 듯 싶다.

이 책에 담겨있는 조선 후기의 모습은 당대 사회·경제·문화·사상을 이해하는 결정적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초간본이 나왔을 때 임형택은 “이 책이 우리 문학사 재구성에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현대 작가들에게 풍부한 주제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개정판 서문에 임형택은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같은 역사소설에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많이 녹아들어 있다”고 했으니 기대는 현실이 됐다. “앞으로도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창조적 변용’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무한하다”고 했다. “근래 ‘한류 열풍’이 일어나서 국민적 기대치가 한껏 높지만 뿌리 없는 나무처럼 바람에 휩쓸려 사라질 우려가 없지 않다”는 걱정 뒤끝에 붙인 말이다.

한문 원전이 담겨 있어 읽을 능력도 되지 않는 제4권을 제외한 세 권을 단숨에 모두 독파했다. 당대를 주름잡던 음악인을 다룬 제2권의 몇몇 예술가론은 1970년대부터 문학은 물론 음악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됐다. 다양한 논문은 물론 단행본까지 나와있으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유효할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언급한 대목은 공유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추월이라는 기생은 금객 김철석과 가객 이세춘과 함께 어울려 최고의 음악 그룹으로 손꼽혔다. 그림은 김홍도의 ‘월야선유도’로 평안감사를 위해 대동강에서 벌어진 환영 잔치의 광경을 담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회상’이라는 작품의 원제목은 ‘추월이 늘그막에 지난 일을 이야기하다’라고 한다. 노래와 춤으로 이름을 날린 추월이라는 공주 기생이 과거를 돌아보면서 세가지 우스운 일화를 소개하는 형식이다. 추월은 당대를 주름잡은 금객 김철석과 가객 이세춘 등과 어울렸다. 음악학계에서는 이들을 두고 조선 후기 최고의 음악 그룹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첫번째 일화만 소개하기로 하자. 이판서 댁이 노래와 연주로 떠들썩했는데 정인군자(正人君子) 한 사람이 들어섰다. 며칠 뒤 이 그룹을 부르는 전갈이 왔다. 바로 그 대감이었다. 자리를 벌이고 단정하게 앉은 대감은 그러나 한마디 부드러운 언사도 없이 대뜸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도무지 흥이 일지 않아 마지못해 노래하니 대감은 “도무지 흥취가 없다”며 거친 음성으로 꾸짖었다.

추월은 얼른 눈치를 채고는 “기회를 한번 주시면 들보를 뒤흔들고 구름을 뚫는 소리가 울려나도록 해보겠다”고 사죄한다. 기생과 악사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대뜸 우조(羽調) 갑사(雜詞)를 불렀다. 고음으로 크게 소리쳐 어지럽게 불러대고 잡되게 화답하니 음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제서야 대감은 “노래가 이래야지”하며 부채로 책상을 두드리며 좋아했다는 것이다.

‘회상’은 19세기 중반에 나온 ‘해동야서’와 ‘청구야담’에 실린 글이라고 한다.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사회상을 그렸다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개런티를 받고 초청 연주에 응하는 일종의 직업음악가 그룹이 성업하고 있음을 추월 일행은 보여준다. 유명세를 떨치는 그룹을 부르려면 적지 않은 비용도 들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생인 추월을 비롯한 음악가들의 신분은 낮은 반면 대감은 신분은 물론 학식도 높아보인다. 그런데 신분이 낮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할 줄 모르고,  음악 자체도 모르는 대감은 사실상 추월 일행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이런 작품이 나왔다는 것은 당시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인간형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조한문단편집’이 생명력을 갖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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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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