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준의 신드롬필름]

‘아우구스투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Nihilist)라고 불렀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는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이라는 최초의 영화를 만들어 상영했다. 아무 스토리 없는 50초짜리 흑백영화. 화질도 아주 저급했지만 상영회가 벌어진 카페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참석한 사람들 중 일부는 실제로 기차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믿어 자리를 박차고 도망갔다. 2018년 현재의 관객들은 어떤가? 스크린 속에서 공룡이 사람들을 물어뜯어도, 이마에 번개모양 흉터가 있는 아이가 지팡이를 휘둘러 마법을 부려도, 천재 억만장자가 강철로 만든 수트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녀도 놀라지 않는다.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 CG(컴퓨터그래픽)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많아진 요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잘 믿지 않는다. 아주 가볍게는 방금 출발했다는 중국집 사장님의 말이나 마술사가 관객에게 확인시켜주는 카드. 누군가에겐 삶의 기저인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 세상에 신은 없다고 너무나 쉽게 말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방금 출발했다던 내 짜장면은 팅팅 불어있고 마술사가 보여준 카드는 결국엔 내 주머니에 끼워져 있다. 일부 종교계 원로들은 횡령을 일삼고 신도들의 믿음으로 모아진 권위로 교리와 법리에 어긋나는 성적일탈들을 행하고 있다. 이렇듯 너무나도 많은 증거들이 믿음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다.

©픽사베이

니힐리즘이나 니힐리스트와 같은 용어는 ‘무(無)’라는 뜻의 라틴어 니힐(Nihil)에서 출발했다. 투르게네프(I. Turgenev)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니힐리스트란 어떤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비록 그것이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액면 그대로는 어떤 원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이런 니힐리즘이 19세기 썩어 있던 서구 유럽의 종교와 제도들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의 기반이 되었고 20세기에 들어 급격히 퍼졌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실존주의와 같은 사상들이 일어났고 세상의 부조리를 이겨내고 자유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니힐리스트들은 죽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타의에 의해 유발된 괴상한 니힐리즘이 퍼지고 있다. 어떤 것도 믿기 힘들고 어떤 것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사회.

최근에 일어난 미투 운동도 변종 니힐리스트들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피해자가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것은 팩트 체크. 쉽게 믿지 않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익숙한 이들의 특성을 이용해 가해자들은 마치 마술사가 패를 확인 시키듯 계약서, 영수증, 피해자의 과거를 내밀며 본질을 흐린다. 무고죄로 고소하여 피해자에게 범죄사실을 증명할 증거들을 요구한다. 그것을 끝까지 증명할 용기와 힘, 소송에 드는 비용과 시간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결국 2차 3차 피해에 시달리다 무너져버리거나 끝나지 않는 소송에 이슈는 무관심속으로 사라진다.

신부나 목사, 스님 등 종교지도자의 횡령과 성폭행, 일탈 등은 믿음이 가장 굳건해야 할 곳에서 터진 사건들이다. 교리가 명문화되어 보전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신념을 공유하는 곳이 종교다. 하지만 그 굳건한 믿음과 명문화된 교리는 성직자들을 지켜주고 성도들을 이끄는 원로들을 신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짓을 했다고 “역시 신 같은 건 없다니까?”와 같은 반응으로 일관하면 안 된다. 이 사건의 본질은 권위를 이용한 개인의 일탈로 보고 그 본질인 종교적 믿음은 부정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종교계는 반드시 그 일탈자들을 감싸지 말고 속출해 확실히 처단하고 자정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배달의 본질을 ‘빠르게’로 설정하면 불지 않은 짜장면을 얻지 못한다. 그것을 위해선 늦어도 되니 불지 않은 짜장면을 요구해야한다. 마술사가 보여주는 마술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해 그들이 우리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주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미투 운동 피해자에게 증거나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러한 행위가 멈추길 바라고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 속에 살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종교계의 일부 원로들을 비난하는 것은 되지만 그 종교계를 통째로 썩었다고 손가락질해선 안 된다.

“늑대가 나타났다!”

양치기 소년의 상습적인 거짓말에 마을사람들은 돌아섰고 끝내 농장의 양들은 늑대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동화의 교훈은 평소 행실을 올바르게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자이지만 필자는 묻고 싶다. 왜 양치기 소년은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했을까? 왜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한사람도 소년의 말을 믿거나 의심하지 않았는가? 어떠한 원리도 끝없이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니힐리스트들의 사회보다 믿음이 필요할 때 믿지 않고, 믿지 않아야 할 것을 믿는 자들이 넘치는 사회가 더 나쁘다. [오피니언타임스=신영준] 

신영준

언론정보학 전공.
영화, 경제, 사회 그리고 세상만물에 관심 많은 젊은이.
머리에 피는 말라도 가슴에 꿈은 마르지 않는 세상을 위해...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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