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규의 하좀하]

[오피니언타임스=한성규] 월드컵을 보러 러시아에 왔다. 월드컵을 보러 그것도 무려 러시아까지 왔다고 하면 뭔가 돈도 많고 잘나갈 거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30대 청년이고 돈도 없고, 직업도 없다. 그에 반해 시간은 많고 직장을 그만두면서 하고 싶은 일은 하면서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월드컵을 한다는 소식에 당장 러시아행 표를 끊어버렸다.

맛있는 것 먹고 호텔에서 자고 하는 응원이 아니라 당연히 생계형 응원을 하고 있다. 숙소도 완전 시골에 있어 버스타고 다시 지하철타고 한 시간 반이나 걸려야 시내에 도착한다. 경기장에도 안 간다. 비싼 경기표 사서 선수들 꽁무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땡볕을 견디며 응원하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한국 전통 기념품을 외국인들에게 나눠주면서 같이 한국을 응원 하고 있다. 월드컵을 보러 온 청년들 중에는 2주 이상 휴가를 낼 수 있는 자영업자나 전문직들도 있지만 놀랍게도 나 같은 백수도 많다.

사진: 픽사베이

벌써 거의 100명에 육박하는 청년들과 한국 기념품을 나눠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말에도 있는 자들보다 없는 자끼리 나누면 더 돈독하다고 했던가. 대화가 시작되면 꼭 북한과 남한의 차이부터 설명해주어야 한다. 로켓맨 김정은과 나는 눈이 좀 작은 것 밖에는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인간임을 납득 시켜주고 나면 항상 이 질문이 따라온다.

“근데, 너는 한국에서 뭐해?”

나는 부끄럽지만 백수라고 답한다. 내가 백수라는 말에 대한 외국청년들의 반응은 한국 사람들과 다르다.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서 말한다. 자기나라에서도 실업문제가 장난이 아닌데 기성세대나 정치인들의 탓이 크단다. 한국 청년들은 거의 대다수가 못난 자신을 탓한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더 노오력을 해야 한다고.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82년생 남자다. 82년생 여자가 많이 힘들었다는데 82년생 남자인 나도 힘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어떤 세대보다 많은 노력을 해왔다고 자신한다. 집에 화장실도 없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마을 공동화장실까지 3분이나 뛰어가서 일을 봤으며, 초등학교의 전신인 국민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국민교육헌장을 못 외운다고 아침부터 얻어터지거나 어떨 때는 아예 운동장에서 다 외울 때까지 서 있었다.

중학교에서도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마치 고3처럼 공부를 했으며 어렵게 들어간 명문 고등학교 재학시절 때도 IMF라는 듣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무시무시한 사건이 터져서 좋은 고등학교와 좋은 대학교를 졸업해도 백수가 될 수 있다는 경고에 잠을 설쳤다. 100에 90은 뜻도 몰랐던 IMF라는 공포 때문에 나라가 외국에 금을 털리는 동안 나의 동심도 함께 털리고 말았다.

대학교라는 곳에 가면 책이나 좀 읽고 룰루랄라 연애나 좀 할 줄 알았더니 웬걸, 대학은 토익이다 대외활동이다를 준비하는 입시학원이나 다름없었다. 대학교만 가면 교과서를 집어던지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하고 싶은 공부를 골라가면서 할 줄 알았는데 절대 아니었고, 대학교에선 그동안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여자애들과 재밌는 시간을 얼마든지 보낼 수 있다는 성생님의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발음이 너무 멋있어서 우간다어를 공부하려고 했지만 바로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곧바로 우간다에서도 통하고 르완다에서도 통한다는 이유로 영어만 공부해야했다. 신문방송학과라는 전공에 맞는 스팩을 쌓으려고 선배들이 한창 술을 마시고 여자애들과 잡담을 나눴다는 1학년 때부터 대학생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나도 몰랐다. 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대학까지 와서 남들이 해야 한다는 일만 하고 있는지. 월드컵을 보러 모인 전 세계 실업청년들이 이런 사실을 지적해 주었다.

“그건 변한 시대에 맞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엑셀이나 영어 이런 건 자기도 못하면서 다 밑에 사람 시키지 않나? 사회에 쏟아져 나오는 청년들은 산업시대의 밑바닥 일을 처리하기 위해 더욱더 배우고 더욱더 열심히 일 해야 하고 거기서 나오는 콩고물의 반 이상은 자리만 지키고 그냥 앉아만 있는 윗사람들이 다 받아먹는다.”

내 노력을 알아주는 그들의 위로에 나는 눈물이 찔끔날 뻔 했다. 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 생활이 요모양 요꼴인 이유가 내 탓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 했다. 더 이상 해도 해도 안 되는 자신을 나무라기만 할 게 아니라고 그들은 강조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을 한 번 더 생각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여기서는 누구도 내 신분을, 내 옷차림을 비난하지 않는다. 기죽지 않고 아침도 빵으로 때우고 점심을 위해 또 이 돌떵이 같은 빵을 챙기고 저녁으로도 빵을 씹어 먹으며 오늘도 월드컵 응원을 하러간다. 외국친구들에게 나눠줄 한국 기념품들도 잔뜩 가방에 쑤셔 넣었다. 오늘은 보자, 코스타리카와 세르비아, 독일과 멕시코, 브라질과 스위스의 경기가 있으니까 남미와 유럽의 청년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월드컵을 보러 온 세계청년들은 에너지로 끓어 넘친다. 예전에는 한창 사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긍정적 에너지를 발산하던 2,30대 젊은이들이 이제는 물러나지 않는 기득권세대들 때문에 사회에 참여할 기회가 막혀버렸다. 청년들은 이제 기성세대들이 입구를 틀어막고 있지 않는 스포츠나 NGO활동, 테러 등 다른 곳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기득권을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는 기성세대들이여, 축구에 미쳐 날뛰는 전 세계의 청년들의 에너지를 보면 두렵지 않은가?

이제 내려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많이 해 먹었다 아이가.

한성규

현 뉴질랜드 국세청 Community Compliance Officer 휴직 후 세계여행 중. 전 뉴질랜드 국세청 Training Analyst 근무. 2012년 대한민국 디지털 작가상 수상 후 작가가 된 줄 착각했으나 작가로서의 수입이 없어 어리둥절하고 있음. 글 쓰는 삶을 위해서 계속 노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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