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의 에코토피아]

“야, 마블링 봐봐. 예술이다, 예술!”

모니터 주위를 빙 둘러 싼 연예인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지른다. 클로즈업 된 화면을 보는 순간 내 머리에도 문학 작품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1++A 등급인 최상급 쇠고기는 어떤 맛인지 궁금해진다. 숨이 막힐 지경으로 맛있을까? 딱 한 점만이라도 기름장에 찍어 맛보았으면 싶다.

카메라가 이동하며 한 남자를 보여준다. 위생복을 잘 갖춰 입은 그가 V 표시를 하며 밝게 웃는다. 그는 한우 등에 무언가를 대고 있다. 한우의 육질을 분석할 때 쓰는 ‘프로브’라는 판이라고 한다. 초음파 기술을 활용해 살아있는 소의 마블링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블링 측정에 기꺼이 응해 준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녀석은 쉼 없이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털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예쁘게 쌍꺼풀 진 눈가가 깨끗한 게 딱 봐도 젊은 소다.

빨래 개는 동안 보았던 텔레비전을 끈다. 저녁 준비를 위해 밖으로 나온다. 메뉴는 이미 정해졌다. 삼겹살이다. 한우 1++A 등급은 엄두 내기가 힘든 살림이다. 대신 삼겹살만이라도 최상급으로 넉넉히 사서 남편과 아들이 실컷 먹을 수 있게 해줄 요량이다.

©픽사베이

무릎 튀어나온 면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아파트 근처 정육점으로 간다. 정육점 앞에 그동안 못 보았던 배너 광고가 세워져 있다. 거기엔 ‘최상급 삼겹살, 처녀 암퇘지 고기 팝니다.’라는 빨간색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다. 방금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최상급 한우도 틀림없이 처녀 암소였으리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암컷은 그저 아가씨만 값을 쳐주는 세태에 억하심정이 인다. 죽을 동 살 동 새끼 낳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 새끼들 토실토실 살찌우느라 몸살 앓아가며 젖 물려 키웠을 어미 짐승들. 나라도 그들을 알아줘야 한다는 동병상련의 정이 샘솟는다. 결국 ‘삼겹살만이라도 최상급으로’했던 결심을 꿀꺽 삼켜버린다.

“아저씨, 아줌마 암퇘지 삼겹살 한 근 주세요. 새끼 제일 많이 낳은 아줌마로요.”

어서 오십쇼, 하며 반갑게 맞아주던 정육점 주인이 뜨악한 표정으로 눈만 껌벅이며 나를 쳐다본다.

나, 아줌마다. 달랑 아들 하나 낳았을 뿐인데 애 키우고 살림만 한 지 10년 만에 복부엔 지방이 가득하고 얼굴엔 마블링처럼 기미가 잔뜩 깔려있다. 볼품없는 등급으로 전락해 버렸다. 슬프다.

하지만 아줌마가 되니 좋은 것이 하나 있다. 새끼를 낳고 키우다 보니 종을 넘어 남의 새끼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쇠고기를 보면 이 소도 어떤 어미 소의 새끼였을 텐데 싶고 삼겹살을 굽다 보면 이 돼지도 어떤 어미 돼지가 힘들게 낳았을 텐데 싶다. 그래서 한 번씩 작정하고 육식을 끊으면 남편과 아들이 고기, 고기 하며 노래를 부른다. 한 달도 못 돼 내 눈 앞에도 차돌박이, 삼겹살, 치킨이 전광판의 글자들처럼 깜박거리며 나를 유혹한다. 그리고 나는 그 유혹에 두 눈 질끈 감고 넘어가곤 한다. 내가 무슨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위안을 삼는다. 그런데 그렇게 나 자신을 합리화할 때마다 한 여자가 떠오른다. 비처 스토, 바로 그녀다.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흑인 노예 가족의 이별을 목격하게 된다. 다른 백인 농장주에게 팔려가는 자녀를 제발 팔지 말아달라고 처절하게 호소하는 흑인 엄마를 보면서 흑백을 넘어선 모성애에 공감하게 된다. 그들의 인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고민한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었고 이 소설 한 편이 노예 해방 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그 당시 백인과 흑인의 관계란 지금의 사람과 동물의 관계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육식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초 밀집 사육을 당하다, 전염병에 걸리면 산 채로 파묻히는 공장식으로 사육당하는 짐승들보다는 더 나았겠지만 말이다.

유명한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는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 하니 마음껏 잡아먹어도 된다.’는 말을 남겼다.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 말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데카르트를 훌륭한 철학자로 간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생명에 대한 예의’ 따위 떠올리지 않고 살아있는 소의 마블링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으니까. 그래야 부드럽고 고소한 어린 처녀 암퇘지 삼겹살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

결국 몇 천 원 더 싼 아줌마 암퇘지 삼겹살을 노릇노릇 구워 남편 수저 위에도 놓아주고 가위로 잘게 잘라 아들 입에도 쏙쏙 넣어준다. 다음으로 상추와 깻잎 위에 쌈장 듬뿍 바른 삼겹살 한 점을 얹고 얇게 저민 마늘과 청양고추까지 넣은 쌈을 내 입안에 넣었다가 사래가 들려 화장실로 달려간다. 기침으로 입안의 것들이 다 튀어나온다. 튀어나온 것들을 닦아내고 입안까지 헹군 다음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본다. 문득 내 영혼의 마블링은 몇 등급이나 될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순간 동물 해방론자 피터 싱어의 말이 떠오른다.

동물에 대한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사람들은 나치다.

누군가 내 영혼에 ‘프로브’를 들이 대지는 않을까,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다.  

 박정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수필가이자 녹색당 당원으로 활동 중.
숨 쉬는 존재들이 모두 존중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해 하나하나 실천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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