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화의 요즘론]

[오피니언타임스=허승화] <버닝>은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지난 5월 17일 국내에 개봉했다. 2018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한국 영화 중에서는 유일하게 진출한 영화기도 하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수많은 한국 평론가들과 현지 평론가들의 호평을 이끌어내며 개봉 전부터 기대를 자아냈다. 그렇다. 이 영화는 평론가 평이 좋았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극장에 가게 된 것이다.

보고나니 영화는 기대보다 더 길었고 여러모로 복잡했다. 나는 주요한 세 인물을 중심으로 버닝을 살펴 보기로 했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 분명해지는데 이 영화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종수(유아인 분), 해미(전종서 분), 벤(연상엽 분) 세 ‘청년’의 이야기다.

영화 버닝 스틸컷 ©네이버영화

#전종서_해미

전종서가 맡은 해미 역할은 뭐든 ‘갑자기’ 하는 걸 좋아한다. 그녀는 ‘의문’, 즉 호기심을 많이 갖고 있지만 사실 그녀 자체가 가장 의문스럽다.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종수(유아인 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고양이처럼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녀가 갑자기 저지르는 일들은 시종일관 이해불가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 하나 하나는 다 극도로 설명적이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설명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증명하려는 듯한 말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녀의 말들은 거짓말과 진담의 중간, 말투는 장난과 정색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그러다 휙휙 극단적 행동을 저지른다. 갑자기 옷 벗고 춤을 춘다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훌쩍대고 있다거나. 이런 인물이 현실 세계에 있을 거라 생각하기 어렵다. ‘갑자기’를 좋아한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녀는 가만히 있던 종수를 자극하는 존재다. 그것이 그녀 역할의 모두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녀에게 기대하는 게 그것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연상엽(스티븐 연)_벤

그는 원래 부자고, 일을 하는 모습은 안 보이지만 고소득을 올린다고 한다. 그는 늘 여유가 넘치며, 당황 하는 일이 없고 세심하다.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겉에서 보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하지만 그는 감정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스스로 눈물 흘린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런 그에게 해미란 인물은 얼마나 신비롭고 이상해 보일까. 그는 해미를 흥미로워 한다. 그러나 그의 흥미는 일시적이고 진심이 아니다. 그는 실은 지루하지만 겉으로는 재미를 추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누군가에게 재미 외에는 받아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줄 것만 있다. 아무리 베풀어도 딱히 모자라지지 않으니까 그는 베풀고 나눈다. 거리낌 없이, 그게 대마초나 거짓된 감정이라고 해도.

#유아인_종수 그리고 영화 전반의 문제들

영화는 기본적으로 종수의 시선에 따라 흘러간다.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이며, 얼마 전 폭행 사건을 일으켜서 구속된 아버지 때문에 파주의 집을 혼자 지키며 산다. 기본적으로 그를 이루는 감정은 ‘억눌린 분노’다. 이창동 감독은 이를 두고 아버지 세대의 분노를 계승한 청년세대를 종수를 통해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초반 이후로 벤과 해미를 관찰하는 입장에 놓인다. 사람들이 한 말, 자신에게 한 행동을 받아들이 기만 하는 것처럼 별 말도 뚜렷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하는 일은 자신의 삶에서 이렇게 쌓여 가기만 했던 감정들, 재료들을 버무려 소설을 쓰는 것이다. 다만 그는 세상이 아직 수수께끼 같아서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벤이 말하는 메타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순함도 갖고 있다.

그도 화가 나서 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해미가 사라지기 직전 질투와 분노의 합작품으로 ‘창녀’란 막말을 해버린 것이다. 그 후로 그는 무슨 탐정이 된 것 마냥 사라진 해미를 찾아 다닌다.

그러던 중 종수는 한 인물과 마주친다. 해미가 내레이터 모델을 할 때 실장으로 있던 사람이다. 그 분은 갑자기 초면인 종수에게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더니 급기야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란 말을 하기에 이른다. 무 맥락의 대사와 근본없는 연기의 극적 만남, 실소가 터진다.

영화의 내용을 잊어버릴 만큼 존재감이 큰 단역의 등장이다. 나는 정신이 들어, 이 영화의 시대 착오적 면면을 하나 둘 떠올린다.

# 버닝을 위한 청년은 없다

버닝의 장르는 미스터리다. 결론 없이 열린 채로 닫아 버린 결말도 그렇고 시종일관 의문 투성이인 인물들 역시 미스터리하기는 하다. 그러나 버닝에서 나오는 메타포들은 하나같이 참 뚜렷하다. 다시 말해 노골적이다. 그래서 지루하고 지친다.

또한 온갖 은유와 상징들은 거의 모두 대사로 표현되는데 그 대사를 운반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평면적 이다. 끝도 없이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별 효과 없이 바닥에 툭툭 던져진다. 나로서는 기대하던 만큼의 명품 연기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실제로 대본 또한 그런 연기를 끌어낼 수 있도록 쓰여지지 않았다고 느껴 졌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찍고 수많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지금 청년 세대를 영화를 통해 그려내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영화가 동시대 청춘들을 그려내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많은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상당히 시대 착오적이고, 특히 여성 캐릭터는 그 정도가 심각하다. 내레이터 모델이라는 직업과 그녀의 의상, 카드빚에도 떠나는 여행, 오로지 노출하다 사라진 여성 캐릭터, 돈 많은 남성에게 붙는 여성들, 돈 달라고 찾아온 어머니 등등 성에 관해 고착화된 편견이 드러난 설정이 많다. 지금은 98년이 아니라 2018년 아닌가.

‘대사’는 이 영화의 현실감을 낮추는 가장 큰 요소다. 매우 현실적인 배경 위에 그려져 있지만 <버닝>은 현실에 발 붙인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인물이며 이야기며 어딘가 붕 떠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하루키적 감성에 영향을 많이 받은 소설가 지망생이 아주 오랜 기간 써 온 단편 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느낌은 물론 종수가 소설을 쓴다는 설정에 따라 어느 정도 의도되었을 수도 있긴하다.

두 시간 반 동안 눈이 빠져라 영화에 집중하였음에도 결국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갖은 노력에도 동시대 청년으로서 영화와 교감하는데 실패 했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청춘을 위한 버닝은 없다’고 말이다.

허승화

영화과 졸업 후 아직은 글과 영화에 접속되어 산다. 
서울 시민이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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