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1편과 3편 엔딩에서 토니 스타크의 대사는 동일하다. I am Iron man(내가 아이언맨이다). 영화에서 번역은 어땠나 모르겠다. 두 대사는 의미가 다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3편의 ‘I am Iron man.’이다.

1편의 ‘I am Iron man.’은 센세이션했다. 히어로물 중에서 자신의 신분을 대중에게 공개한 것은 토니 스타크가 처음이었다. 클라크 켄트도, 부르스 웨인도, 피터 파커도,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히어로의 정체성이 발각될 경우 시선의 감옥에 갇혀 일반 시민으로서의 개별성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절대선의 주체는 텅 빈 도로도 무단횡단할 수 없고, 사적으로 급한 일이 있더라도 사소한 길거리 시비를 지나쳐서도 안 된다. 악당들에게 노출될 위험은 말할 것도 없다.

토니의 ‘I am Iron man.’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한 독립적 자아관의 표출이었다. 세계가 나를 보며 뭐라고 떠들어대든 토니는 ‘나는 나’였다. 중학생 감성의 허세가 아니었다. 토니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자신에게 발생하는 어떤 문제도 스스로 해결했다. 악당들에게서 탈출하는 과정에 잉센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대출이었다. 상환하면 그만이었다. 주체적 자아의 끝판왕이 등장한 것이었다.

아이언맨3 스틸컷 ©네이버영화

토니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이었다. 타자는 배제되었다.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 선언 과정에 관계자들과 사전 조율도 없었다. 여성은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프로모션을 꾸며줄 악세서리였다. <아이언맨> 2편에서 닉 퓨리가 토니를 어벤저스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도 토니에게서는 팀웍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고, <어벤저스> 1편에서 캡틴이 토니에게 철조망에 대신 들어갈 희생을 모른다고 했을 때, 토니는 철조망을 치우는 게 낮다며 희생의 가치를 무질렀다. 이후에 토니는 핵폭탄을 들고 우주로 날아가지만 그것은 희생정신에서라기보다는 철조망을 치우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자신의 판단 때문이었다. 토니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거나 하고 싶다, 그러므로 한다.’ 그뿐이었다.

‘나’는 자아와 타아의 교집합에 머문다. 엄마와 있을 때, 친구와 있을 때, 직장 상사와 있을 때 내 캐릭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타아가 내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자아와 타아의 성분비가 9:1이든 3:7이든 달라지는 것은 개인차이고, 최적의 성분비가 상호 간에 합의되는 현상을 사랑 혹은 우정이라 부른다.

<아이언맨> 1편에서 토니의 ‘나’는 10:0에 수렴했다. 토니는 그렇게 살아도 되었다. 무상으로 공공선을 수호하는 히어로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경우 얼마든지 보상해줄 압도적 부가 있었다. 문제는 우리다. 능력도, 돈도, 힘도 없는 주제에 타자에게 요청하는 9:1, 8:2는 너무한 거 아닌가? (역으로, 개인의 자아관이 바뀌었는데도 0:10의 관계를 요청하는 기업은 시대착오적이다.)

우리는 타자와 관계 맺기에 서툴러졌다. 인권 탄압의 반작용으로 이기심에 육박할 정도로 개인의 가치가 부각된 탓이다. OO충으로 일컬어지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자기중심성은 이런 도식을 따른다. 시민 대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이질적인 타자를 참지 못한다. 인맥의 득실을 알고, SNS로 타자와 접촉 기회가 늘어났지만, 나는 나와 타자 사이에 ㅋㅋㅋ를 가로 질러 놓고 관계를 적당히 표백한다. 가면을 쓰고 처세 공식을 이용한다는 것을 서로 안다. 가면 안의 나는 이물질이 묻지 않아 무사하다. 혼밥과 혼술이 편해지고, 연애나 결혼에서도 ‘서로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맞지 않는데 굳이’가 우세해진다. 함께 있되 ‘우리’가 아닌 관계들이 피로해질밖에. 우리인 적 없어 외로울밖에.

관계의 진공에 빠진 사람들 중 일부는 ‘너’가 아니라 ‘나’에게서 답을 찾는 우를 범한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나’들은 자신이 커뮤니티 속으로 동질화된다. 커뮤니티 내부 결속이 높아질수록 외부를 적대감 수준으로 배척한다. 커뮤니티에서의 나는 관계를 맺기보다는 자기 복제를 반복한다. 내가 나를 강화한다. 돈도, 아이언 슈트도 없는 수많은 토니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자의 부정, 혐오와 악플뿐이었다.

<아이언맨> 3편에서 토니는 자기 복제의 끝을 내달렸다. 토니는 페퍼를 통해 가끔 외부와 연결될 뿐,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냈다. 연구실의 대화 상대는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 자비스였다. 자비스는 나의 외부, 타자가 아니었다. 토니를 보조해줌으로써 토니의 ‘나’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연구실에서 자비스와 함께 토니는 아이언 수트를 만들었다. 수트는 강력한 자기 복제물이었다.

그러나 자기 복제의 정점에서 ‘나’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이언맨> 시리즈에서 최초로 자비스 전원이 꺼져 토니의 ‘나’가 위축되었다. 적과의 전투 상황에서 공수되던 마크42가 철구조물에 부딪쳐 부서지는 것도 강화되지 못한 토니의 ‘나’를 상징했다.

‘나’를 살 찌우는 매개는 타자다. 타자와 연대를 통해서 ‘우리 안의 나’가 되면 나는 우리만큼 커진다. 페퍼와 정서적 거리가 좁혀지는 만큼 토니도 변했다. 1편의 잉센과는 탈출이라는 목적이 같은 파트너십을 체결했다면, 3편의 시골 마을 꼬마와는 정서적 유대를 이뤘다. 수트와 접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토니를 구한 것은 불의 전사(?)가 된 페퍼였다. 아이언맨의 오른팔을 사용해 적을 물리쳤다.

내가 모든 나를 잠식할 필요 없다. 내 지분의 일부를 타자에게 내줄 때,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자기 복제물인 슈트를 폭발시키는 결말은 토니의 내적 성장을 축하하는 불꽃쇼로 읽힌다. 폐허가 된 집에서 읊조린 ‘I am Iron man.’은 관계적 자아로의 성장인 것이다.

1편의 ‘I am Iron man.’은 기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당당하게 발화되었다. ‘내가 아이언맨이다.’로 번역하고 싶다. ‘-가’는 주격조사로서 주어가 강조된다. 3편의 ‘I am Iron man.’은 자신이 변했다며, 부드럽게 발화되었다. ‘나는 아이언맨이다.’로 번역하고 싶다. ‘-는’은 보조사로서 앞의 명사를 주제로 만든다. ‘나’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너’가 필요하다.

혼자 <어벤저스> 3편을 조조로 본 날을 기억한다. 미세먼지가 갠 그날, 나는 말하고 싶었다. 타노스 쩔지 않느냐고.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몸 밖을 빠져 나가지 못하는 말이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이 곪아 만들어진 이 글은 오피니언타임스-마크3다. 오늘도 자아가 한 겹 더 비만해져, I am Iron man. 물론, 짝퉁이지만.

[긴 사족] 토니는 성장한다. <어벤저스> 2편에서 타자가 사라지고 혼자 된 나를 체험한다. 완벽한 10:0은 사실상 무(無)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는 세계 질서에 편입을 주장하는 것은 캡틴이 아니라 오히려 토니였다. ‘세계 안의 나’를 의식하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 홈커밍>에서는 피터 파커의 심리적 아버지를 자처한다. 타자를 자기 내부에 수용하는 수준을 넘어서 타자의 필요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벤저스> 마지막회에서 토니가 철조망을 치우지 않고 희생하는 건 어떨까? 단, 이때의 희생은 캡틴 같은 신념이 아니라 인류애 수준의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 토르의 새 망치를 들어 고결함이 증명되는 것도 좋겠다. 마블이 최고의 수입원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을 것 같지만, 나 또한 토니 스타크의 팬으로서 아쉽지만, 탕아에서 성인(聖人)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의 완결성을 기대하게 된다.

 김봉성

대충 살지만 글은 성실히 쓰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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