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피가 뜨거워야 할 젊은이의 몸에서 피는 식었습니다.

그리고 두 눈에는 흥건한 눈물이 괴어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젊은이의 마음은 낙망과 설움으로 가득 차 있고, 온몸에는 병도 깊었군요. 이런 몸으로 과연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가수 강석연(姜石燕, 1914~2001)이 불렀던 노래 ‘방랑가’의 한 대목은 차디찬 북국 눈보라 퍼붓는 광막한 벌판을 혼자 의지가지없이 떠나갑니다. 이 노래 가사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야말로 비극적 세계관의 절정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1920년대 초반 당시 우리 민족의 마음속 풍경은 이 ‘방랑가’의 극단적 측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좌절과 낙담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1919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펼쳤고, 죽음을 무릅쓴 채 불렀던 만세소리는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우리의 주권회복 운동은 잔인무도한 일본군경의 총칼에 진압이 되고 말았지요. 그 후의 처절 참담한 심경은 말로 형언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1920년대의 시작품도 몽롱함, 까닭모를 슬픔, 허무와 퇴폐성 따위의 국적을 알 수 없는 부정적 기류가 들어와 대부분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그 독한 마약과도 같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1931년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낸 노래 한 편이 발표되어 식민지 청년들의 울분과 애환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랑가’였습니다. 한 잔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부르면 그나마 답답하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듯했습니다. 줄곧 명치끝을 조여오던 해묵은 체증 같은 것이 다소나마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누가 알거나

돋는 달 지는 해 바라보면서
산 곱고 물 맑은 고향 그리며
외로운 나그네 홀로 눈물 지울 때
방랑의 하루해도 저물어가네

춘풍추우 덧없이 가는 세월
그동안 나의 마음 늙어 가고요
어여쁘던 내 사랑도 시들었으니
몸도 늙고 맘도 늙어 절로 시드네

-‘방랑가’ 전문

강석연은 1914년 제주도 제주면 삼도리(三徒里)에서 출생했지만, 일찍이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자랐습니다. 언니 강석제와 오빠 강석우는 토월회에서 활동하는 배우였고, 특히 언니의 영향을 받아서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예능방면으로 천부적 재능이 있어서 연극, 라디오드라마 출연, 노래 등으로 이름이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제주 출신가수로서는 한립읍 명월리에서 태어난 백난아보다 강석연이 훨씬 먼저였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 진출해 있던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 서울지점에서 노래 잘 부르는 강석연을 뽑아서 전속으로 편입했습니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가수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기생, 영화배우, 연극배우 등이 가장 만만한 가수 발탁의 대상이었습니다.

소설가이자 유명작사가였던 박노홍의 증언에 의하면 강석연의 외모는 ‘다소 통통하게 생겼으며 모든 행동에 야무진 구석이 많았고, 노래 부르는 모습과 창법도 야무졌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1931년 2월 강석연은 ‘방랑가’와 ‘오동나무’ 등 두 곡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강석연의 위상을 가수로 심어주는 일에 크나큰 기여를 했지요.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반응이 워낙 드높아서 여러 레코드회사에서는 여타 인기곡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노래를 이애리수를 비롯한 다른 가수의 버전으로 취입하여 발매하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광복 후에는 고운봉, 명국환 등이 재취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독 강석연이 부른 노래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우뚝한 창법으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을 잘 담아서 들려줍니다. 강석연의 방랑가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파른 세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반성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대책 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경고와 메시지를 작품의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유튜브(www.youtube.com)에서 방랑가를 검색해보면 뜻밖에도 일본과 타이완에서 이 노래가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연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放浪の唄’란 제목으로 1932년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 사토우보노스케(佐藤惣之助) 작사 표시가 된 음반이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가 되었습니다. 고가 마사오 작곡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가 조선에서 전래해오던 옛 가락을 다시 다듬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가사는 원곡의 분위기와 전혀 다릅니다. 노래는 1932년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가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하세가와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일본에서도 데뷔했던 가수 채규엽(蔡奎燁)으로 그가 일본에서 가수생활을 할 때 쓰던 이름입니다. 1962년 일본에서는 가수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가 다시 이 노래를 편곡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船は港に 日は西に いつも日暮れにゃ 帰るのに 
枯れた我が身は 野に山に 何が恋しうて 寢るのやら

捨てた故鄉は 惜しまねど 風にさらされ 雨にぬれ 
泣けどかえらぬ 青春の 熱い淚を 何としよう

路もあるけば 南北 いつも太陽は あるけれど
春は束の間 秋がくる 若い命の 悲しさよ
-‘방랑가’의 일본버전 ‘放浪の唄’ 전문

한편 타이완에서는 ‘유랑지가(流浪之歌)’란 제목으로 진분란(陳芬蘭)이란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대만에서 ‘우야화(雨夜花)’란 제목의 본토민요로 아예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유랑가의 일본버전이나 대만버전이 모두 뱃노래를 방불케 하는 쓸쓸한 울림의 내용입니다.

船也要回反來 日落黃昏時
去處也無定時 阮要叨位去
拖磨的阮身命 有時在山野
爲何來流目屎 爲何會悲傷
-‘방랑가’의 대만버전 ‘流浪之歌’의 1절

유튜브에 실린 일본판 ‘방랑의노래’ ©이동순
1931년 동아일보에 실린 강석연 인터뷰 기사 ©이동순

식민지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이렇게 일본과 중국에서 여전히 청년세대들에 의해 즐겨 불려왔고 기타 연주곡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동북아시아 일대의 음악적 영향관계는 이처럼 결코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긴밀한 상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노래는 가사의 표면에 나타난 내용을 문맥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 주변에 서려있는 울림과 내적인 반향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제대로 된 맛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방랑가와 같은 음반의 앞뒷면에 수록된 신민요 ‘오동나무’는 또 어떠합니까?

당시에도 검열의 매서운 눈초리는 삼엄했을 터이지만 이 노래의 효과는 전반적으로 눈물, 이별, 설움, 원한 따위에 대하여 그 원인을 따져서 묻고 비통한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5절 가사에서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황야가 웬일인가’란 대목을 읽으며 우리의 억장은 일제에 대한 분노와 서러움으로 무너지는 듯합니다. 그 아름답고 평화롭던 금수강산의 현실이 이제는 제국주의 식민지의 황막한 황야로 변모해버린 정황에 대하여 개탄을 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래가사가 아니라 거의 민족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치는 웅변적 효과와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담긴 대목을 가수 강석연은 처연하게도 불러냅니다. 후렴구에서의 여운은 이런 비통한 심정을 한층 고조시킵니다.

오동나무 열두 대 속에
신선 선녀가 하강을 하네
에라 이것이 이별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산신령 까마귀는 까욱까욱 하는데
정든 님 병환은 점점 깊어가네
에라 이것이 눈물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홍도 백도 우거진 곳에
처녀 총각이 넘나드네
에라 이것이 사랑이란다
에라 이것이 서러움이라오

아가 가자 우지를 마라
백두산 허리에 해 저물어 가네
에라 이것이 이별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황야가 웬일인가
에라 이것이 원한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신민요 '오동나무' 전문

이미 여러 해전의 일입니다. 어느 신문에 기고했던 강석연 여사에 대한 기사를 보고 전화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그 글 내용을 보고 감격했다는 전화의 주인공은 바로 강석연의 아들 방열(方烈) 씨였습니다. 지난날 농구선수와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대학총장을 거쳐 현재 대한농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분이지요. 방열 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일제말 언론인이었던 부친 방태영(方台榮, 1885~?) 선생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가고 그 험난했던 시기를 거치는 동안 강석연 여사는 오로지 가족부양과 자녀양육에만 전심전력을 쏟은 것으로 보입니다. 피난생활 중에는 임시수도 부산 영도에서 미용사로 일했었고, 엄격하고도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었습니다.

방열 씨의 회고에 의하면 소년시절 다락방에서 웬 붉은 보자기로 싸인 물건 하나를 발견했었는데요. 아들이 이것을 보고 궁금해서 끌러보려 했을 때 어머니 강 여사는 깜짝 놀라며 그 물건을 아주 깊은 곳으로 감추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보자기 안에는 과거 가수와 배우시절의 여러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아들은 끝내 그 내용물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과들은 가수 이애리수의 모습과도 매우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옛 가수들은 이처럼 자신의 대중연예활동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이것이 자녀들의 학업과 성장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냉엄한 판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풍각쟁이의 자식’이라는 시각을 갖게 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0년대 초반 강석연은 일본의 빅타레코드사 본사 초청으로 이애리수, 김복희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합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빅타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했고, 도쿄의 유명한 히비야(日比谷)공회당 무대에서 콘서트를 갖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어느 대중잡지사 기획으로 조선의 대표가수 4인 중 하나로 선발되어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 쓴 글자판 하나씩 들고 찍은 기념사진도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이애리수, 김복희, 김선초 등과 함께 강석연은 1930년대 “조선의 아이돌가수” 쯤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

강석연이 가수로서, 혹은 대중연예인으로 남긴 SP음반은 꽤 그 분량이 많습니다. 가요작품과 넌센스, 스켓취, 영화설명 등 다양한 장르로 확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요작품이 가장 많습니다. 현재 작품의 목록은 거의 확인 정리가 되었으나 아직도 음반의 실물을 확인하지 못한 개체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험한 세월 속에 부서지고 마멸되어 그 모습을 감추어버린 것이지요. 아주 희귀한 음반들이지만 언젠가는 밝은 별처럼 우리 앞에 하나둘씩 나타날 것이라 확신합니다.

유성기 음반자료는 식민지시대 주민들의 내면풍경을 고스란히 알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많은 음반자료들이 여전히 먼지를 덮어쓴 채 우리 앞에 그 전체의 실체를 나타내지 않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동안 가파른 세월의 파도가 드세게 휘몰아쳐가는 경과 속에서 많은 음반들이 파괴되어 사라지고 설사 남아있는 것이라도 그 귀한 모습을 꼭꼭 감추어버린 것일 터이지요. 하지만 남아있는 음반이라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수집하며 갈무리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정성스럽게 갖추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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