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진한의 잊힌 소국, 조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지금은 마늘과 컬링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의성은 과거 진한 12국(=삼국사기는 11국) 중 하나인 조문국(=소문국)이 있던 곳이다. 삼한의 여느 소국처럼 조문국 역시 명확한 기록이 많지 않기에 자세한 왕계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단지 <삼국사기> 벌휴왕 조를 통해 “185년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군주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했다"라는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금성산 고분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남쪽 25리에 금성산이 있다고 했다. ©김희태

조선시대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본래 소문국(召文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여 경덕왕 때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다"라고 했다. 이후 고려 때 의성부로 승격되며, 이 지명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같은 기록에서 “소문국의 옛 터가 현의 남쪽 25리에 있고, 소문리로 불린다는 사실”과 금성산이 현의 25리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기록을 보면 현 금성산 일대가 조문국의 중심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문국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기에, 발굴조사로 출토되는 유물의 해석을 통해 가능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전면에서 바라본 傳 경덕왕릉 ©김희태

현재 조문국의 중심지로 알려진 금성산 고분군 중 가장 대표적인 고분을 꼽으라면 傳 경덕왕릉(이하 경덕왕릉)을 들 수 있다. 경덕왕릉의 발견은 조선 숙종 때 간행된 미수 허목의 <미수기언>을 통해 알려지게 되는데, 기록 자체는 야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로의 기록보다 설화 형태로 전해지는데, 이야기의 형태 역시 몇 가지가 된다.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의성군수의 꿈에 경덕왕이 나타나 능의 개보수를 명하고, 이에 경덕왕릉을 조성했다”거나 “밭에서 누워서 자던 백성의 꿈에 경덕왕이 나타나 자신의 능이라는 것을 밝혔고, 이에 이 사실을 관청에 알려 능의 개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성은 일부 차이가 있지만 ‘현몽’을 통해 경덕왕릉의 존재가 확인되고, 능의 개보수가 이루어진 점은 공통점이다.

傳 경덕왕릉에 세워진 비석 ‘조문국 경덕왕릉’이라 새겨져 있다. ©김희태

이처럼 개보수가 이루어지면서 경덕왕릉에는 석물과 비석이 세워졌다. 또한 경덕왕릉은 지금도 제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앞선 기록을 통해 경덕왕릉을 포함한 금성산 고분군 일대가 조문국과 관련된 유적지인 것은 사실로 볼 수 있지만, 해당 고분이 경덕왕릉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는 없다. 따라서 경덕왕이 실존한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우며, 이런 의미에서 전한다는 의미의 傳 경덕왕릉이라 불리고 있다. 따라서 경덕왕릉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접근보다 조문국의 상징성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해보면 좋은 현장이다.

적석목곽분과 깃털모양 금동관의 등장, 경주에서도 등장한 고구려 관장식

조문국과 관련한 유물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을 꼽자면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들 수 있다. 이 금동관은 새의 깃털을 닮았다 해서 새 조(鳥)에 깃 우(羽)를 써서 ‘조우형’ 금동관으로 불린다. 고분의 제Ⅴ묘곽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동 시대의 신라의 금관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금동관이 출토된 묘제 양식은 신라에서만 나타나는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인데 반해, 그 내부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신라의 것과는 다른 고구려 집안에서 확인된 금동관식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집안에서 출토된 깃털모양 관꾸미개와 유사하다. ©김희태

삼국의 역사에 있어 적석목곽분은 신라에서만 확인되는 묘제 양식으로, 출현 시기는 내물왕을 시작으로 지증왕에 이르는 마립간 시기에 등장하고 있다. 신라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적석목곽분이 경주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의성처럼 금성산 고분군과 탑리 고분, 대리리 2호분 등 많은 양의 적석목곽분이 확인된 건 특징점이라고 할만하다. 이는 신라의 중앙 묘제 양식이 이식된 결과로, 당시 의성 지역의 중요성과 함께 서라벌(=경주)에서 직접적인 통치 혹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묘제는 신라의 것인데, 출토된 금동관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대리리 2호분의 안내문, 적석목곽분이지만 동시에 토기는 의성의 것을 따르고 있어 독자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김희태
깃털모양 관꾸미개, 고구려의 관장식이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김희태

 

여기서 신라의 금관에 대해 살펴보면 현재까지 ‘금관총’,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 ‘금령총’, ‘서봉총’ 등에서 출토되었다. 신라 금관의 외형을 보면 크게 ‘출(出)’자 형태의 신목과 사슴뿔을 형상화하고 있다. 반면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깃털모양 금동관은 신라와는 전혀 닮은 점이 없고, 집안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금동관식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금동관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구려가 의성 지역에 교류 혹은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황남대총의 남분에서 출토된 ‘황남대총 남분 은관’,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희태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깃털모양 형태의 관장식이 경주에서 출토된 바 있는데, 바로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 제631호, 높이 17.2cm)’이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으로 조성된 고분으로, 부부의 묘로 추정이 된다. 그런데 여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북분에서 신라 금관이 출토된데 비해, 남분에서는 신라 금관과 다른 형태의 고구려의 관장식을 한 은관이 출토가 되었다. 따라서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조우형 금동관과 황남대총 남분 은관의 출현은 고구려와 신라, 의성 지역 간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측면과 고구려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처럼 기록이 많지 않은 삼한시대의 소국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를 통해 역사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傳 경덕왕릉과 조우형 금동관이 들려준 역사의 흔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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