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의 글로 보다]

[오피니언타임스=김동진] 대학시절, 과방에 방명록이 있었다. 방명록보다는 공용노트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암튼 적당한 두께의 스프링 노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 노트에는 과방에 들어오는 사람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남길 수 있었고, 그 안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나 오늘 미팅 감. 예감이 좋다‘ ’000 교수님 수업 너무 지루해요. 인간 수면제‘ ’오늘 비도 오는데 수업 째고(?) 낮술 할 사람??‘ 등 주로 개인적이고 가볍고 짧은 글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 유난히 일기 쓰듯 길게 글을 쓰는 후배가 있었다. 노트에 쓴 글은 익명이었지만 글쓴이가 누군지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 후배는 일기 쓰듯이 노트 한바닥을 가득 채울 만큼의 글을 썼다. 특별한 비밀이 담겨있진 않았고 그저 평범한 일상이야기였지만 말 그대로 일기를 왜 이 공용노트에 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 안가 그 노트는 그 후배의 개인 일기장처럼 되어 버렸고 결국 공용노트로서의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후배의 글 이후로 그 노트에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는 글들이 조금씩 늘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그 노트에 글을 쓴 적이 거의 없다. 공개된 곳에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더라도 어미를 뭐로 끝낼지, 말줄임표는 2개로 할지 3개로 할지 고민하는 성격 탓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다 보는 곳에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놓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기도 했다.

©픽사베이

그 뒤로 그 노트의 존재를 잊고 지내다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트위터 때문이었다. 트위터를 처음 본 순간 이건 많은 사람이 함께 쓰는 공용 노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는 정말 이런 것까지 적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지극히도 사소한 얘기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말 그대로 도배하듯 적거나, 일상에서 겪은, 어쩌면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개인적인 경험들도 아무렇지 않은 듯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글들을 보면서 아무리 개인적인 경험이라지만 남들이 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글들을 올리는 사람들의 용기(?)와 심리가 궁금했다. 트위터는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것이 가능한 공간이라 더 솔직하고 적나라한 글들이 많이 올라왔으리라.

그 이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자신의 왜곡된 인식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강간 피해자를 옹호하고 강간범에게 동조하는 발언이나 성소수자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등, 자신의 이름과 프로필 사진을 버젓이 올린 계정에서조차 사람들이 쉽게 동조하기 힘든 생각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적어도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볼 텐데 저런 글을 올리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한 소방관이 자신의 SNS 계정에 여성에 대한 폭력을 희화하는 글을 상습적으로 올려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나대다가 남성한테 살해당하는 여자들이 많다’느니, 생리하는 여성을 ‘피싸개’라 부르고 피 냄새난다고 놀리듯 깔깔대는 글들을 올린 것이다. 결국 해당 공무원은 자신의 글로 인해 소방당국의 감찰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가 소방공무원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SNS 계정에 올린 글까지 공무의 연장이라고 봐야 하는지, 또 그로 인해 업무상의 책임과 처벌을 받아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관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옹호하는 글을 올린 것도 놀라웠지만 소방관이라는 자신의 직업과 얼굴까지 공개한 계정에서 어떻게 저러한 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올릴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그게 너무 놀라웠다. 수많은 매체의 등장으로 ‘나’를 표현할 공간도 그만큼 많아졌다. 하나하나의 사소한 글들이 결국은 나란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말로 누군가를 혐오하고 상처 입힐 자유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김동진

한때 배고픈 영화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들 독서수업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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