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오늘은 여름휴가를 변산반도를 비롯한 전라북도 서해안으로 떠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더불어 찾아볼 만한 산중암자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변산반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쌍선봉 아래 자리잡은 월명암이다. 예부터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하나로 꼽힌 암자다. 글자 그대로 땅 기운과 주변 지세의 조화로 번뇌가 끊어질 정도의 길지(吉地)라는 것이다.

변산반도는 전체가 관광자원이다. 해안을 둘러보면 북쪽으로는 변산해수욕장을 비롯해 격포항과 채석강, 남쪽으로는 곰소항과 모항갯벌해수욕장이 있다. 내륙으로는 변산반도국립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국립공원의 산길을 걷다 보면 내변산와 외변산의 바다풍경은 덤으로 따라온다. 부안 사람들이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형 국립공원’이라고 자부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월명암 대웅전 ©서동철
쌍선봉 삼거리의 이정표 ©서동철

월명암에 가려는 사람들은 보통 변산반도 북쪽의 남여치주차장에서 출발하는 등산 코스를 택하게 마련이다. 과거 국립공원 매표소가 있던 남여치에서 1.9㎞ 남짓 산을 오르면 암자가 나타난다. 하지만 산길을 걷는데 자신이 있다면 남여치에서 출발하든 내소사가 있는 내소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하든 직소폭포를 거쳐 국립공원을 종단해도 좋겠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만든 지도에서 구간별 거리를 더해보니 남여치에서 내소사는 9.1㎞에 이른다.

월명암은 이른바 ‘기도발’이 잘 받는 암자로 유명하다. 호남지역에서는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영험있는 3대 기도터로 꼽힌다. 하지만 절대자에게 뭔가를 빌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도 월명암은 흥미롭다. 필자의 경우에는 ‘부설전’(浮雪傳)이라는 한편의 소설이 그렇다. 이 작품은 1913년 ‘조선불교월보’에 실린 이후 지금까지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오랫동안 작자 미상으로 알려졌지만 1975년 영허대사 해일(1541~1609)의 ‘영허집’에 작품이 실려있음이 확인됐다. ‘불교 설화’에서 ‘불교 소설’로 격상된 순간이기도 하다.

절 마당에서 바라본 내변산 ©서동철
묘적암 마당의 삽살개 ©서동철

‘부설전’의 줄거리는 이렇다. 신라 진덕여왕 시절 서라벌에 진광세(陳光世)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영리하고 비범했다. 다섯 살에 불국사 원정선사의 제자가 됐고 일곱 살에는 법문에 통달할 정도였는데 법명을 부설(浮雪), 자를 의상(宜祥)이라 했다.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의상이라는 이름에서 화엄종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고승 의상(義湘·625~702)을 떠올리게 된다.

이야기를 이어간다. 부설은 지금의 변산반도인 능가(楞迦)의 법왕봉 아래 묘적암(妙寂庵)을 짓고, 도반 영조·영희와 수도에 힘썼다. 세 사람은 문수도량인 오대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는데, 도중 두릉 구무원의 집에서 머물며 법문을 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묘화(妙花)라는 딸이 있었다. 묘화는 부설의 설법을 듣고는 죽기를 작정하고 그와 평생을 같이 하려 했다.

묘화라는 이름에서는 다시 선묘(善妙)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선묘라면 의상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머물던 집 주인의 딸이다. 선묘는 의상을 깊이 사모했고, 의상이 귀국할 때 바다에 몸을 던지며 '용이 되어 대사를 보호하겠다'고 서원했다는 여인이다. 의상이 지은 영주 부석사의 큰법당인 무량수전 뒤편에서 이런 설화가 담긴 선묘각이 있다.

부설은 출가한 만큼 묘화에 마음이 흔들릴 처지가 아니었지만, 한 여인의 목숨을 구한다는 보살행의 정신으로 그곳에 머무른다. 부설은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남매를 두었는데, 한편으로는 수도에 전념해 5년 만에 크게 깨쳤다. 이 대목은 원효(617~686)와 닮은 꼴이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사이에 설총을 낳은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사성선원 편액 ©서동철

이렇게 보면 ‘부설전’은 신라시대 쌍벽을 이루던 두 고승 원효와 의상의 다양한 일화를 이리저리 가공해 활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부설(浮雪)이라는 주인공의 이름마저 의상과 선묘의 로맨스가 어린 부석사의 부석(浮石)에서 차운한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돌(石)을 눈(雪)으로 돌려놓았을 뿐 신이(神異)하거나 초인적인 능력은 다르지 않다.

국문학계는 ‘부설전’을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구전 설화가 문자로 정착하면서 고승이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승전(僧傳)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보는 듯 하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비슷한 내용의 구전 설화도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작품 속에서 원효와 의상의 이야기가 소설적 장치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보면서 설화가 발전한 단계라기 보다는 그야말로 ‘창작’의 과정이 깊게 개입됐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다시 ‘부설전’으로 돌아간다. 영조와 영희가 오랜 수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부설을 찾았다. 세 사람은 공부가 얼마나 무르익었는지를 알아보겠다며 물병을 달아놓고 하나씩 쳤다. 영조와 영희의 병은 깨지면서 물이 사방으로 튀었으나 부설의 병은 박살이 났음에도 물은 그대로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속세에서 수도한 부설의 깨달음이 오히려 깊었다는 뜻이다.

‘부설전’은 선악(仙樂)이 울리는 가운데 부설이 입적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의 두 자식 등운과 월명도 도를 닦아 열반했고, 부인 묘화는 깨달음에 버금가는 경지에 이르며 110세 수(壽)를 누렸다. 이후 산문(山門)의 덕이 높은 스님들이 두 자녀의 이름으로 암자를 세웠고, 이것이 등운암과 월명암이라는 것이다.

‘조선불교월보’에 실린 ‘부설전’은 월명암이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을 바탕으로 한다. ‘영허집’에 실려있는 내용과 같다고 한다. 월명암의 필사본 부설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월명암은 소설 속에서 부설이 본격적으로 수도를 시작한 묘적암 터에 지어졌다. 지금도 월명암에는 묘적암이라 편액한 전각이 있다. 지금 등운암이라는 암자는 멀리 충청도 계룡산 자락에 있다. 하지만 부설전에 등장하는 그 등운암인지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월명암 경내에 자리잡은 사성선원(四聖禪院)의 존재도 잊지 말아야 한다. 네 사람의 성인을 기리는 선원이라는 뜻이다. 사성(四聖)이 부설과 묘화, 등운과 월명을 가리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쯤되면 현실과 설화가 둘이 아니고 설화와 소설이 또한 다르지 않으니, 결국 현실과 소설이 불이(不二)가 아닌 꼴이다. 월명암은 이렇듯 흥미진진한 절이다.

빼놓지 말아야 할 재미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조용하기만 한 암자에 닿으면 붙임성 좋은 삽살개 두 마리가 달려와 손님을 맞이한다. 월명암의 명물로 자리잡은지 오래라고 한다. 넉살도 좋은 삽살개들은 절 구경하는 손님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친한 척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놈들과 헤어지는 것이 서운해 절 마당을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서동철

문화유산 전문 언론인

문화재위원 역임

서울신문STV 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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