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연의 하의 답장]

[오피니언타임스=이하연] 어쩌면 화해란 별 게 아닐지도 모른다. 화해의 과정이야 복잡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화해하자”라는 말로 틀어졌던 사이가 원만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거기에 악수까지 청하면 금상첨화다. 짜증 섞인 말투로 서운함을 토로하던 이도 민망함에 어쩔 줄 모르는 이도, “사이좋게 지내자”는 누군가의 당찬 목소리 한 큐에 하나가 된다. 단, 이 규칙에도 조건이 하나 있다. 반드시 서운함을 내비쳐야 한다는 것이다.

ⓒ픽사베이

10여년 넘게 친구관계로 지내온 이들이 있었다.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이상하게 이 모임만은 지키고 싶었다. 소속감이랄 것도 없는 고작 3명의 집합체이긴 하지만 뭐랄까, 고향에서 숨을 쉬는 느낌을 준달까. 학창시절에 만난 우리는 같은 동네 사람들이다. 다행히 동네를 떠난 이가 없어 대학생활의 추억까지도 공유할 수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공과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각자가 서로의 과거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흐름을 같이 탔기 때문이다. 입을 통해 알려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그 과거 이야기의 등장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대화가 편할 수밖에 없다. 사소한 소재라 한들 여기저기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 자신이 넘쳐났다. 거기에 동네라는 메리트 있는 약속장소까지 더해졌기에 우리는 그 편안함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종적을 감췄다. 사실 그녀가 사라진 건지 우리 둘이 사라진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긴 하지만. 적어도 2~3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만나던 우리들이었다. 늘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기쁨과 슬픔을 나눴다. 어쩌다 보니 그녀를 2년 간 만나지 못했는데, 그 불편함이 마음 한 편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나 원인을 찾아보려고도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 다 사라지고 정리되는 법이지, 라고 뭉뚱그렸을 뿐이다.

그녀가 사라지고 우리는 둘이 되었다. 꾸준한 만남 속에서도 매번 그녀를 떠올렸다. 나 혼자서만 불편함을 느꼈던 게 아니었다. 어느 날 우리는 그 불편함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열띤 토론을 하던 중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불편함은 다름 아닌 서운함이었다. 그녀가 우리를 잊어버린 것 같다고, 그녀의 목록에서 우리가 사라진 것 같다고 열심히 투정을 부렸다. 결국 술기운을 빌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서운함을 전달했다.

용기를 냈던 탓일까 우리는 가까스로 다시 셋이 되었다. 역시 관계의 회복엔 ‘서운함 토로’가 잘 먹힌다. 오랜만에 우리는 늘 만났던 동네의 익숙한 식당과 카페를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한 명만 투정을 일찍 부렸어도 이 만남이 좀 더 빨리 찾아오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내 눈을 쳐다보더니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야, 진짜 서운해 너. 너희가 뭐가 서운해. 내가 더 서운해.”

흠, 역시 모든 이들의 입장을 듣는 건 중요하다. 그렇지, 아주 중요하고말고. 그녀의 서운함 스토리가 시작되었고, 다른 친구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번갈아가며 눈치를 보고 있던 나는 큰 소리로 “우리 화해하자!”를 외치며 마지막 용기를 부렸다. 대성공이었다.

이하연

얼토당토하면서 의미가 담긴 걸 좋아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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