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렬의 맹렬시선]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2007년 12월 23일 오후, 전날 비가 내린 후 화창해진 오사카 난바 거리를 걸었다.

일어에 능통한 대학 친구와 함께 배낭 메고 떠난 첫 일본 여행이었다. 점심으로 회전초밥 식당에서 가득 배를 채운 터라 소화도 시킬 겸 주변을 걷기로 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지도 어플 대신 공항에서 얻은 큼지막한 지도를 펼쳐 들었다. 백화점, 호텔 등 랜드마크를 기준으로 방향을 잡고 난바역 주변을 걸었다. 번화가 특유의 부산함은 낯선 이방인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가득하다. 으레 호객꾼들도 들러붙어 유창한 한국말로 가게 상품을 홍보한다. 옷에 태극기 로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대단한 눈썰미다.

노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쓰인 Tower Record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 유명한 음반 체인점이라고 친구가 알려주었다. 슬슬 다리도 저려오고 있어 구경 삼아 들어가 보자고 했다. 5층 매장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통기타 반주와 함께 맑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매장의 BGM이라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매장 가운데 간이 무대 위에서 여자 가수가 노래하고 있었다. 고음을 넘칠 듯 말 듯 오가면서도 여린 감성을 지닌 섬세한 목소리였다. 어느 순간 우리는 백여 명 남짓의 관객과 함께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4곡 정도의 미니 콘서트가 금새 끝났다. 갑자기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친구가 스태프에게 물어보더니 당일 음반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사인회 대기 줄이라고 했다.

ⓒ이명렬

이름도 모르는 여가수의 음반을 샀다. 충동구매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3000엔이면 든든한 저녁 한 끼가 되어줄 수 있는 기회비용이다. 여행은 일탈을 부추긴다. 낯선 풍경과 이국적인 향신료, 알아듣기 힘든 언어에 오감이 곤두서고, 때론 육감도 필요하다. 공항 면세점이 장사가 잘되는 이유는 단지 세금을 깎아줘서만은 아닐 것이다. 여행자만이 가지는 흥분과 설렘은 쉽게 지갑을 열리게 한다. 영수증을 들고 맨 뒤에 섰다. 이미 사인된 보드를 나눠주는 방식이라 줄은 금세 줄었다. 가수 앞에 섰다. 친구가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당신의 노래는 매우 아름다웠다’라는 말을 전했다. 여가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상냥하게 몇 마디를 건넸다. 난 알아듣지 못했지만 최근 내한 공연을 했고, 자신의 노래를 들어줘서 감사하다는 말이라고 했다. 가볍게 악수 하고 사인 보드를 받았다. 사인과 함께 듀공의 그림이 앙증맞게 그려져 있었다. 토키 아사코(土岐麻子)와의 첫 만남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토키 아사코를 검색해 보았다. 1997년 CYMBALS 밴드의 보컬로 데뷔했고, 통통튀는 베이스와 흥겨운 리듬감으로 큰 인기를 모았던 시부야 케이의 대표 주자였다. 2004년 밴드 해체 후 토키 아사코는 솔로로 데뷔해 재즈풍의 팝 음악을 부르기 시작했다. CYMBALS 시절 젊고 발랄한 목소리는 싱그러운 봄날 조깅하며 듣기에 제격이고, 솔로 이후 재즈 리듬 위의 말랑한 목소리는 가을 숲길에 연인과 함께 듣기에 안성맞춤이다. 지금도 카페 배경 음악으로 토키 아사코의 음악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귀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감성을 자극하는 멜로디. 상대방의 숨소리와 미세한 심장 고동에 집중하게 만드는 템포. 썸과 사랑 사이. 두근댐과 익숙함 사이의 절묘한 접점에 그녀의 목소리가 있다. 그녀가 1970년대 미국 펑크 밴드인 Earth, Wind & Fire의 원곡을 재즈풍으로 리메이크해서 부른 ‘September’가 여전히 사랑 받는 이유다.

2009년 7월 초, 도쿄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관광 겸 콘서트 참석이 목적이다. 극성 팬들이나 시도한다는 이른바 원정 콘서트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친구에게 부탁해 콘서트 표도 예매해 놓았다. 친구는 S석 첫 번째, 1열로 당첨되었다고 강조했지만, 공연장에 도착해보니 알파벳 I열로 9번째 줄이었다. 지금처럼 해외 구매 대행이 없던 시절이니 표를 구해준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을 기념해 7월 7일, 7시 7분, ‘Love Song’을 테마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콘서트에서 부른 음악과 현장 분위기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너무 집중했는지 2시간 동안 압박 면접을 본 기분이었다. 허기가 졌다. 친구 자취방 근처 마트에서 저렴한 발포주와 유통기한이 임박해 할인 중인 빵을 샀다. 금융 위기 여파로 두 배 가까이 오른 엔 환율에, 6,000엔이라는 콘서트 티켓은 비정규직 청춘들에게 큰 사치였다. 후덥지근한 도쿄의 여름 밤, 드라이한 발포주의 목 넘김과 함께 토키 아사코와의 두 번째 만남은 끝이 났다.

ⓒ이명렬

토키 아사코는 매년 앨범을 내고 여려 CM 송을 부르며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조그만 스캔들을 내더니 작년엔 결혼도 했고, 인스타그램에 달콤한 신혼이 느껴지는 음식 사진도 자주 올라온다. 나도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팬질은 꾸준히 하고 있다. 아마존 해외 배송으로 음반을 사고, 유튜브로 최신 뮤직비디오도 찾아보곤 한다. 10년 전 우연한 마주침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것을 생각해보면 인연이란 것이 묘하다. 그때 산책 방향이 조금 달랐다면, 타워 레코드에 30분만 늦었더라면, 토키 아사코란 가수는 평생 몰랐을 것이다.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수많은 인연들도 스쳐 지나갔을 것이고, 겨우 잡은 인연도 나의 불찰로 인해 놓친 것도 많다. 카카오톡 친구리스트에 있는 수많은 인연 중 최근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연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주변에 만들고 싶은 인연이 하나도 없다면? 그럼 여행을 떠나자. 낯선 곳에서 또 다른 토키 아사코가 당신의 눈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찰나 같은 삶 속에서 자신만의 인연을 찾아 나서는 것은 청춘의 권리이자 의무다. 

이명렬

현 메타비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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