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여기는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다. 낮 최고 기온은 영천, 창녕 등 신흥 강자들에게 1위를 빼앗기곤 하지만, 여전히 최고 수준의 폭염 지역이다. 폭염의 백미는 밤이다. 습도가 고인 분지는 한낮의 열기를 꼭 끌어안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매미까지 난립하여 잠이 어지럽다. 피곤이 쌓인다.

대프리카 원주민이 보장하는 휴가지가 있다. 이곳은 혼자 훌쩍 떠나도 좋고,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가도 좋다. 그 이름도 고루한, 도서관. 에어컨 빵빵한 은행을 찾는 90년대 감수성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도서관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과열된 것은 날씨만이 아니다.

ⓒ픽사베이

‘워라밸(work&life balance)’의 욕구가 말하는 것은 일과 생활이 불균형한 현실이다. 일, 일, 일의 속도전은 여름만큼 뜨겁다. 과거에는 과로가 근면, 성실의 미덕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착취의 부덕으로 이해된다. 착취의 주체가 회사냐, 나 자신이냐가 달라졌을 뿐이다. 늘 목표를 향해 달린다. 목표가 달성되면 재빠르게 다음 목표를 만들어서 또 달린다.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꺼릴 것이 없으므로 자기 착취는 가혹하다. 습관적으로 자기 착취 중이지만,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점점 커졌다. 속도 안쪽에서는 하얗게 불태운 자기 소진, 속도 바깥에서는 저항으로 인한 발열이 만성이었다. 마음도 폭염 중인 것이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도서관이 많다. 검색만 해도 시립, 구립 이외에도 ‘이동’, ‘숲’, ‘낮은’, ‘작은’ 도서관들이 나온다. 이왕이면 도시 주변부에 있는 대학 도서관을 권하고 싶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기까지 갈 가치는 충분하다. 전기세 두려워하지 않는 에어컨으로 카디건이 필수다. 여행은 날씨가 반인데, 그곳에서는 한겨울에 보일러와 에어컨을 동시에 튼 채 이불에 폭 파묻힌, 포근한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접근성이 나쁜 탓에 방학 때는 학생이나 인근 주민이 적어 널널해서 좋다. 4인 테이블을 독점할 수 있는 여유까지 이 여행의 기본 옵션인 것이다.

카디건 외에 도서관에 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책 한 권을 다 읽어야겠다는 속도의 습관과 스마트폰을 집에 두는 것이다. 책 한 권을 다 못 읽어도 괜찮다. 완결, 완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야만 최대한 느린 시간을 퍼먹을 수 있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이 여행의 주적이다. 짜투리 시간마다 폰을 봄으로써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속도에 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 텅 빈 것 같은 느림이다.

독서는 느림의 밀도가 가장 높은 행위다. 잠을 자지 않는 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의외로 힘들다. 멍때리기 대회 입상자를 제외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 한다. 10분은커녕 3분도 가만히 있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독서는 주의를 책으로 집중시킨다. 실제로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지만 고요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무언가’는 동영상 시청과 달리 고도의 능동성을 요구한다. 이 고요한 능동성에 머물러 있으면 속도에 파묻힌 ‘나’가 유물처럼 출토된다. 느리게 읽을수록 피서 효과는 배가된다.

ⓒ픽사베이

사실, 유치하고 치사한 충만감도 도서관의 맛을 높이는 데 한몫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험서나 영어 교재를 파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때, 혼자 소설책 한 권을 보고 있으면 알량한 우월감도 든다. 시험 시간, 혼자 문제를 다 풀고나서 쩔쩔매는 친구들을 훑어보는 전교 1등의 기분이랄까. 수험생들이 고속으로 달리는 덕분에 내 상대 속도는 더 떨어지기 마련이다. 상대 속도를 늘리기 위해 만화책 스무 권 정도를 싸들고 가볼까도 싶었지만, 아직 그러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느림의 에너지는 양가적이다. 수험생들의 속도감까지 알게 모르게 흡수된다. 수험생들의 속도는 간절하다. 속도의 나르시즘에 빠져 있었다면, 빠져나오는 데 꽤 효과를 볼 수 있다. 다음 날 달릴 절대 속도야 변하지 않겠지만, 더 열심히 살고 싶은 기분이 충만해진다.

책상에 엎어져 자는 것은 숨겨진 재미다. 만화방의 라면, 당구장의 짜장면처럼 맥락이 주는 특별한 맛이 있다. 이제는 다 봐야 한다는 강박에 쫓길 필요도 없고, 선생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밤새 매미에 시달린 잠을 달달하게 충전하고(전기가 가득 찬 듯 팔뚝이 찌릿찌릿 저리고), 250원짜리 자판기 커피로 잠을 마무리짓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유래 없는 열돔 안에서 전국이 평범한 대프리카가 되어버렸다. 선블록을 무용하게 만드는 햇살 아래서 관습적인 휴가를 떠날 게 아니라 ‘마음껏 틀려도 괜찮은 시간’에 푹 절여지는 건 어떨까? 시원하게 느려지는 것이다. 동남아 어느 휴양지 해변 야자수 그늘의 해먹에서 꾸벅꾸벅 조는 기분이 기다리는 도서관에 가자, 라고 도서관에서 쓴다. 

 김봉성

대충 살지만 글은 성실히 쓰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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