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자신의 몸속에 갈무리된 이른바 ‘끼’라는 것은 아무리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제압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지요. ‘끼’는 아마도 기(氣)에서 유래된 말로 여겨지는데 남달리 두드러진 성향이나 성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줄곧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배우나 가수들이야말로 이 타고난 끼를 마음껏 발산하고 그 재주를 뽐내어야 비로소 대중적 스타로서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는 타고난 끼에 자신의 모든 운명이 휘둘려서 생의 한 구간을 살아갔던 인물입니다.

순회연극사 소속의 이애리수는 여러 단원들과 함께 관서지방 일대를 돌며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 악극단이 마침내 경기도 개성 공연을 마치던 날, 극단의 중요 멤버인 왕평(王平, 1907~1940)과 전수린(全壽麟, 1907~1984) 두 사람은 멸망한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의 만월대(滿月臺)를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휘영청 보름달이 뜬 가을밤이었는데, 더부룩한 잡초더미와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는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으로서의 서글픔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비감한 심정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와 그날 떠오른 악상을 곧바로 오선지에 옮겼고, 가사를 만들었습니다.이름도 특이한 이애리수(1910~2009)는 1930년 ‘황성(荒城)의 적(跡)’(‘황성 옛터’의 원래 이름) 한 곡으로 우리 문화사에서 그 살뜰한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운 사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한 경과를 보면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민족의 심금을 울려주는 단 한 편의 절창(絶唱)을 남길 수 있는가의 문제는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애리수는 20세기 초반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렸을 때의 이름이 음전(音全)으로 예능의 끼가 펄펄 넘치는 아이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완고한 집안 어른들에게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해 늦가을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의 막을 올릴 때 이 노래를 배우 신일선(申一仙, 1907~1990)에게 연습시켜 연극공연의 막간(幕間)에 부르도록 했습니다. 신일선은 나운규(羅雲奎, 1902~1937)가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희 역을 맡았던 어여쁜 배우였습니다. 이 곡을 듣는 관객들의 볼에는 저절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깊은 한숨까지 들렸습니다. 모든 청중들의 가슴에는 망국의 서러움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비분강개한 심정이 끓어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무대에서는 주로 이애리수가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마침내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난 이 심사를 가삼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넷터야 잘 있거라

-‘황성옛터(황성의 적)’ 전문

이애리수의 대표곡 ‘황성의적’ 음반레이블 ⓒ이동순
이애리수의 황성의적 가사지 ⓒ이동순

전국의 가요팬들은 이 ‘황성의 적’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어났습니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창가나 영화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사이에 5만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워낙 인기가 높아가자 일본 경찰 당국에서는 바짝 긴장의 털을 곤두세웠습니다. 혹시라도 이 노래의 가사 속에 민족주의 사상이나 불온한 내용이 없는지 뒤지고 두리번거렸지요. 극장에서도 반드시 임석 순사가 입회하여 흥분한 관중들 앞에서 가수가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금지했고, 나중에는 기어이 트집을 잡아서 발매금지를 시키고 말았지요. 이 노래를 만든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경찰서에 불려갔습니다.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계급주의 문학운동에 열정을 쏟던 카프(KAPF) 계열의 청년들은 밤마다 토론을 마치고 술집에 모여 마신 술이 거나하게 오를 때면 일제히 일어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황성옛터’의 3절 가사를 비장하게 합창을 했다고 합니다. 노래를 부르다 끓어오르는 감개에 북받쳐 흐느끼는 청년문학인들도 필시 여러 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이애리수의 인기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비롯한 기생가수의 출현, 이난영, 전옥 등 새롭고 모던한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가수들에게 가요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지요. 창가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 반열에서 급격히 퇴조하게 됩니다. 묵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변화의 거친 물결은 그 자체가 너무나 비정하고 막을 수 없는 이치일 테지요. 한 잡지사가 조사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도 이애리수의 노래는 앞 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점점 그녀의 이름은 대중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裵東弼)! 하지만 이미 배동필에게는 부모가 맺어준 처자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애리수에게도 지난날 그녀의 노래를 사랑하던 이광재란 자산가청년과 진작 정분을 맺어 세 살 바기 아기가 하나 있었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젊은 유부남 유부녀가 불륜으로 만나 사랑을 키워간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과 가수라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행한 난관이 수렁처럼 자꾸만 앞을 가로막습니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칼모친이라는 수면제를 다량 삼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목을 면도칼로 그어서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정사를 시도합니다. 이런 아슬아슬한 정황이 집주인에게 발견되어 긴급히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입원을 하게 되지요.

몇 차례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두 사람은 당시 언론과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어이 동거생활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갑니다. 배동필은 두 아내를 처첩으로 거느린 야릇한 광경으로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처첩간의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이애리수는 이후에도 또 다시 자살을 시도해서 신문기사의 화제로 오르는데 두 번째의 자살시도에 대해서는 언론과 사회에서 매우 싸늘한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듯한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를 마지막 곡으로 취입하게 됩니다. 그 애처로운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을 서러움으로 빠뜨렸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음독기사에 등장하는 이애리수와 배동필 ⓒ이동순

하늘에 구름지면 꽃잎도 움추리고
님께서 눈물지면 내 맘도 섧습니다.
우실 때 같이 우는 마음이 약한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가물어 물 마르면 꽃잎도 시들시들
님께서 성내시면 내 맘도 조입니다
성낼 때 떨고 있는 마음이 약한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광풍이 불어오면 꽃잎도 나불나불
님께서 뿌리치면 내 맘도 아득해요
가시는 옷깃 잡는 마음이 약한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전문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 부모는 이 노래를 듣고서 결국 두 사람의 부부로서의 사랑을 승낙하게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남7녀의 자녀가 태어났고, 이애리수는 무대를 아주 떠나서 현모양처로만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8년, 뜻밖의 기사 하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것은 왕년의 가수 이애리수가 경기도 일산의 한 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보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대를 떠나 종적을 감춘 지 어언 80여년! 세월이 흘러서 가수는 호호백발 할머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20대 시절의 사진과 현재의 얼굴모습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은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그 선과 윤곽이 또렷하게 닮아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특집을 준비하고 인터뷰 프로그램을 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009년 3월31일 9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이애리수의 장남 배두영 선생과 함께 ⓒ이동순

여러 해전 민권변호사 홍성우 선생의 안내와 도움으로 이애리수 여사의 장자(長子)인 배두영 선생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두 분은 경기고 동창이었습니다. 유명기업체의 대표이사로 일하다가 은퇴했다는 배두영 선생은 부친 배동필 선생이 졸업한 연세대학교 출신입니다. 나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예전 가수 출신 어머니들은 자신의 과거경력을 일절 비밀에 붙여두었는데 그 까닭은 자녀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조심스런 판단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노래의 작사가 왕평(본명 이응호)은 1940년 폴리돌레코드 악극단을 이끌고 전국순회공연 중 평북 강계에서 무대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파극 ‘남매’를 공연하게 되는데 홀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남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입니다. 하지만 오빠 역을 맡은 주연배우가 배탈이 나서 무대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왕평이 대역으로 출연하여 열정적 연기를 펼쳤는데 가출한 지 삼년 만에 집에 돌아온 여동생을 꾸중하는 오빠 연기를 너무 적극적으로 쏟아놓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왕평은 돌연 심장에 통증을 느끼며 가슴을 부여안은 채 무대 위에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황급히 달려왔지만 왕평은 기어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곧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평이라는 대중연예인은 이처럼 무대 위에서 공연 중에 생을 마감한 대중연예인으로 특별한 사례가 되었지요. 당시 왕평의 나이는 불과 33세였습니다.

왕평 사망 기사 ⓒ이동순왕평의 사망기사는 평북 강계에서의 특급전신으로 보내온 매일신보의 기사로 사진과 함께 보도가 되었습니다. 워낙 애달픈 요절(夭折)이라 1941년 12월, 오케레코드사에서는 ‘오호라 왕평’(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남인수 노래, 오케 31080)이라는 추모 가요곡을 만들어 음반으로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임자는 무대에서 울기도 했소
그대는 레코드에 웃기도 했소
아 팔도강산 안 간데 없으련만
어델 가서 찾아보랴 서러운 사람아

세상길 넘는 고개 섧기도 했소
밤늦은 정거장에 졸기도 했소
아 임자 없는 창살에 지나치다
어델 가서 불러보나 떠나간 사람아

인정도 참사랑도 끓어올랐소
현해탄 오고가며 히도리 컸소
아 항구일야 목 맺힌 목소리를
어델 가서 들어보랴 서러운 사람아

-가요곡 ‘오호라 왕평’ 전문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함께 동거하던 만담가 나품심(羅品心)이 머리를 풀고 극진한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나품심은 왕평의 유골을 안고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로 내려갔습니다. 서울 대중연예계의 많은 벗들이 왕평의 마지막 길을 함께 동반해서 따라갔지요. 왕평의 부친 이권조 선생은 고향 영천을 떠나 청송으로 거처를 옮기고, 수정사(水晶寺)란 사찰의 승려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유골상자를 안고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수정사 앞산에 장사지내려 하였으니 일제 경찰당국은 줄곧 매장허가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왕평의 부친은 아들의 유골을 개울물에 띄워 보냈다며 거짓으로 순사를 따돌리고 밤에 몰래 산기슭에 묻었습니다. 하지만 봉분이 없는 가매장(假埋葬) 상태로 오늘까지 그대로 방치된 처연한 무덤이 되고 말았지요. 왕평의 동거 여인 나품심은 해방이 되고 사회주의자로 변신하여 분단 직후 북으로 올라갔고, 북한 만담계의 개척자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어느 해 가을, 왕평 아우님 이응린 옹의 안내를 받아서 왕평 선생의 무덤을 감격적으로 참배할 수 있었습니다. 때는 가을이라 상수리나무, 떡갈나무의 잎들이 뚝뚝 떨어져 왕평 선생의 초라한 무덤을 덮고 있었습니다. 노래가사 그대로 ‘황성옛터’를 방불하게 했고, ‘폐허의 쓰라린 회포’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해간 소박한 제물을 차려놓고 소주를 올린 뒤 두 번 절 드렸습니다. 갖고 간 아코디언을 품에 안고 왕평 무덤을 여러 바퀴 돌면서 ‘황성옛터’를 연주하는데 너무도 비감한 분위기에 두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여러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왕평 선생 무덤 앞에 소박한 묘비를 하나 세우고, 그나마 작은 정성을 갖추었는데 이 실마리로 청송군에서는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 돌계단을 만들고 입구에는 안내판까지 세우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자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의 왕평 무덤과 묘비 ⓒ이동순
왕평 선생 무덤 앞에서 아코디언으로 ‘황성옛터’를 연주하는 필자 ⓒ이동순

이애리수 이후로 많은 후배가수들이 이 ‘황성옛터’를 불러서 음반으로 발표했습니다. 고복수, 신카나리아, 남인수, 최병호, 원방현, 김용만, 손시향, 오기택, 남상규, 김희갑, 은방울자매, 박일남, 최숙자, 최정자, 정원, 배호, 이미자, 나훈아, 남진, 패티김, 문주란, 봉봉사중창단, 이수미, 조영남, 최헌, 김태곤, 김정호, 한영애, 조용필, 신중현, 이생강 등등 다수의 가수와 연주자들이 ‘황성옛터’를 가창이나 연주로 음미하고 재해석했습니다. 조용필이 불렀던 ‘황성옛터’는 많은 가요팬들의 가슴을 사무치게 하는 절규의 창법으로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대구MBC에서는 왕평의 생애와 ‘황성옛터’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왕평, 조선의 세레나데’를 제작해서 방송했습니다. ‘황성옛터’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1930년대 초반 일본인들까지도 ‘조선의 세레나데’라 부르며 즐겨 불렀다고 합니다.

일본의 작곡가 타키렌타로(滝廉太郎)의 가요작품 ‘고조노쯔키(荒城の月, 1901)’의 영향 속에서 ‘황성옛터(荒城의迹)’가 제작 발표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무근입니다. 곡의 분위기와 창법상의 특징이 서로 판이하고 유사성을 별반 지니지 않습니다. 다만 제목구성이 비슷한 점은 있겠지요.

해마다 가을밤만 되면 처량한 귀뚜라미 소리를 효과음으로 해서 이따금 라디오나 TV를 통해 듣게 되는 귀에 익은 슬프고 애잔한 가락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애리수의 '황성옛터(황성의 적)'입니다. 줄곧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노래 한 곡이 지닌 위력은 그토록 완강하던 식민지의 어둠을 조금씩 깨어 부수는 힘으로 움직였고, 전체 한국인들이 험한 세월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저력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태어나 고통과 시련의 세월 속에서 엄청난 위로와 격려로 겨레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던 노래 ‘황성옛터’는 이제 영원불멸의 민족가요로서 마치 하나의 기념비처럼 우리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