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오피니언타임스=황진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취임사를 찾아봤다. 그는 2011년 9월 27일 취임식에서 ‘헌법이 사법부에 부여한 사명’을 제시했다. 첫째 ‘법치주의를 구현함으로써 일관성이 유지되고 예측가능성이 보장되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를 조성하는 것’, 둘째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다수의 그늘에 묻혀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대법원

취임사를 배반한 자가당착

이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온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 목록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통상임금, 과거사 국가배상 제한, 키코, 쌍용차 정리해고, KTX 승무원 정리해고, 교원노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원세훈 국가정보원의 댓글 조작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이 1,2심 판결을 파기함으로써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깨뜨렸다.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앞장서서 침해했다. 이런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있을 수 있나.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는 국민의 마음 속에 기정사실화했다. 7월30일 재판거래·판사사찰 의혹 관련 139개 문건이 추가 공개되면서 ‘정황’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생각이 굳어졌을 것이다. 추가 문건을 보면 대법원은 사법부가 아니라 정치 집단처럼 행동했다. 상고법원을 도입한다는 명목으로 청와대뿐 아니라 국회와 언론에까지 로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사건의 재상고심 판결을 미루는 대가로 외교부에게서 해외 파견 법관 자리를 더 얻어내려 한 정황도 확인됐다.

국민은 재판거래 기정사실화

그전까지만 해도 재판의 외관상 공정성만 무너졌기를 바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6월1일 자택 근처 놀이터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법원 재판이나 하급 재판에 부당하게 간섭·간여한 바가 결단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추가 공개 문건은 재판 거래 계획만 있었을 뿐 실행되지는 않았다는 변명을 받아들일 수 없게 했다. 외관상 공정성은 물론 실체적 공정성까지 무너졌으리라는 심증을 굳히게 했다. 대법관 13명 전원은 지난 1월과 6월 각각 ‘청와대와의 부적절한 소통은 없었다’, ‘재판 거래 의혹은 근거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는 입장문을 내놨다. 또다시 그런 입장문을 내놓는다면 국민은 분노할 것이다.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국민이 얻어낸 사법부 독립, 정치권력에 넘겨 이익 취하려 했나

이제 검찰이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 거래·판사 사찰 의혹을 포함한 적폐를 어느 선까지 밝혀내 청산하느냐가 남았을 뿐이다. 검찰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전 기획조정실장을 포함해 재판 거래에 책임이 있는 관련자들을 철저하게 가려내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관련자 중 현직 판사는 신분을 보장받으므로 탄핵 또는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청와대와 거래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판결들은 재심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 재판 거래는 삼권 분립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법부의 사명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사법 농단’, ‘헌정 파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이유이다.

인권 변호사의 원조격인 한승헌 변호사는 최근에 펴낸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에서 재판권의 독립은 법관들이 쟁취했다기보다 국민의 투쟁, 특히 법관들이 ‘죄인’이라고 감옥에 보낸 피고인들의 싸움과 수난으로 쟁취됐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 증거로 1987년 6월 항쟁을 겪고 난 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법부에 대한 공권력의 간섭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예시한다. 이처럼 국민과 형사 피고인의 투쟁으로 얻어낸 재판권의 독립을 사법부 수장이라는 분이 청와대에 넘겨 훼손하려 한 것은 물론 KTX 해고 근로자를 비롯한 억울한 재판 피해자들을 양산했으니 국민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상고법원을 도입하려 한 것 역시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자리를 늘리려는 방편이었다는 비아냥이 커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공개된 재판거래 의혹 관련 139개 문건 일부.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청와대) 설득 전략’이란 제목으로 상고법원을 BH가 주도하도록 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검찰 수사 거부하면 특별재판부 도입해야

사법부는 자중해야 한다. 검찰이 7월 말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강제수사에 본격 돌입한 이후,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자택, 법원행정처 등 20여 곳 넘게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임종헌 전 차장의 주거지·사무실과 외교부 등 3곳에 대한 영장만 발부했을 뿐이다. 제 식구와 집안 감싸기에만 급급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법부의 독립은 국민이 공정한 재판을 받기 위해 제도화한 것이지 사법부의 집단 이익이나 자리를 보전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검찰 수사가 시늉만으로 얼렁뚱당 넘어간다면 검찰 역시 가재는 게 편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법부의 인적 청산이 선행돼야 한다. 지금처럼 법원이 검찰 수사를 막고 방해하면 특별재판부를 설치해 압수수색 영장 심사와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을 담당토록 해야 한다. 국회 입법으로 검찰과 별도로 특검을 설치해 온 것처럼 법원 조직 밖에 특별재판부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 분산해야

대법원장의 권한을 견제·분산하는 입법이 필요하다. 정치 권력 같은 외풍이 아니라 대법원장과 그를 보좌하는 법원행정처의 재판 간섭과 영향력 행사, 곧 내풍이 문제인 시대가 됐다. 진앙지는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이다. 그 핵심은 대법관 임명 제청권, 헌법재판관 3명과 중앙선거관리위원 3명 지명권을 포함한 법관 3000여명의 인사권이다. 대법원장의 견제 없는 인사권은 사법부의 관료화, 수직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만들어 법관으로 하여금 윗분의 눈치를 보고 독립적인 재판을 할 수 없도록 한다. ‘승포판’(승진을 포기한 판사)이 아닌 한 승진에 유리한 보직과 지법부장→고법부장→ 법원장→ 대법관 승진에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는 대법원장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

국민의 사법적 통제 장치 필요

사법부를 견제·감시할 수 있는 국민적 통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법관은 선출된 권력이 아닌 임명된 권력으로 헌법상 철저하게 신분을 보장받는 데다 ‘엘리트’라는 의식까지 충만해 종종 국민을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다. 양승태 대법원은 국민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권 역시 국민에게서 나온 것이고 위임받은 것이다. 법관들이 주권재민의 원리를 체화하지 않고 경시한다면 이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당연하다.

1981년 4월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 물러난 이영섭 전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나날이었다”고 회고했다. 총과 칼, 정치 권력에 의해 그런 수모와 굴욕을 겪던 시대는 지나갔다. 양승태 대법원은 오히려 자신이 칼자루를 쥔 것처럼 정치 행보와 ‘딜’을 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했다. 양승태 대법원에 대해 역사가 어떻게 평가하고 기록할지 궁금하다.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공동대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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