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오피니언타임스=이광호] 보이콧은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 중 하나이다. 보이콧이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선 작품에 대한 성실한 이해와 비평이 필수적이다. 그 작품이 비윤리적이라 보이콧한다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창작자와 창작물에 대한 비판과 반론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작품이 어떤 이유에서 문제가 되는지 밝히는 것은 지루하고 고난한 작업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반론은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창작물이 창작자를 떠나 세상에 던져진 순간 비판과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어떤 것에도 성역은 없다. 독립과 자유를 지향하는 인디밴드의 음악이라도 말이다.

Ⓒ픽사베이

밴드원의 성폭행 사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유선전화 번호길래 통화버튼을 눌렀다. 내 이름을 말하며 본인이 맞냐고 했다. 맞다고 했다. 예매했던 영화가 배급사의 사정으로 상영 취소되었다는 안내였다. 인디밴드 더 모노톤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인투 더 나잇>을 예매해두었는데 개봉 첫날 상영 중단된 것이다. 상영 중단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배급사의 사정이라고만 했다. 검색해보니 밴드 멤버 두 명의 성폭력 사실이 드러나 인터뷰 및 개봉을 전면 중단했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상영 중단과 밴드의 해체는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사건 발생 후에도 밴드 활동을 지속한다는 것은 사실상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책임을 지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밴드 멤버와 관객이라는 관계를 이용한 사건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함께 밴드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더 모노톤즈는 모든 활동을 종료하고 해체를 선언했다. 또한 더 모노톤즈를 연상하게 하는 활동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드코어 펑크 씬의 모습을 담은 <노후 대책 없다>라는 영화가 있다. 펑크의 역사와 저항정신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출연진이 동료 뮤지션을 성추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화의 내용과 상반되는 출연진들의 행동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만든 영화 또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만 다른 사건들과는 다르게 피해자가 자신의 동의 없이 사과문이나 입장을 밝히지 않기를 바랐고 가해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특정 개인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펑크 씬 내에도 남성 중심적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펑크 씬의 개선을 원했다.

피해자는 그 영화로 인해 아름답고 멋지게 포장되는 그 문화가 떠오를 때면 미칠 거 같았다고 했다. 이후 감독 이동우는 계간지 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에서 ‘하지만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한다고 해서 이미 생긴 피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우리의 반성이 멋지게 평가되는 것과 우리의 반성을 지지하는 응원의 말과 박수는 피해와 상처를 입은 분들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자유와 저항을 지향하는 음악을 하는 밴드들도 그들의 노래와 언행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중식이 밴드’가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에서 자작곡을 부르고 있다. Ⓒ슈퍼스타k 방송 캡처

가사 속 미소지니(Misogyny)

20대 총선에서 정의당과 공식 테마송 협약을 맺었던 중식이 밴드의 여성혐오 논란이 있었다. 중식이 밴드의 노래는 보이콧의 대상이 되었다. 논란이 되었던 가사를 일부를 아래에 가져왔다.

-여성혐오는 ‘여성을 혐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비하하거나 대상화하는 등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미소지니(Misogyny)의 번역임을 밝힌다. 여성혐오로 번역하였을 때 ‘여성’과 ‘혐오’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인식되기 쉽지만 여성을 혐오하고 싫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빚까지 내서 성형하는 소녀들, 빚 갚으려 꿈 파는 소녀들, 빨간 집 붉은빛이 나를 울리네.…
<선데이 서울>

…너에게 밥을 사고 술을 사도, 거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넌 내게 맘을 절대 안 줄 것 같다.
너에게 꽃을 주고 반지를 줘도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넌 내게 맘을 절대 안 줄 것 같다.
넌 비싸 보이기 위해 치장을 하고 싸구려가 아니라 말한다. 난 말이 통하게 명품을 줘도 쉬운 여자 아니라 말한다.…
<좀 더 서쪽으로>

…카메라를 보지 마 그런 눈을 하지 마 네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하는 모습 보여주지 마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나랑 사귈 때에 너는 저런 체위 한적 없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내 꼬추가 더 크다
네가 나를 떠나 만난 사람 존나 작은 변태 새끼야
야동보는 나도 뭐 그래 나는 외로워서 그래 밤에 잠 안 와서 그래 그래
<야동을 보다가>

<선데이 서울>에서는 몸을 파는 여성이, <좀 더 서쪽으로>에서는 밥과 술, 명품 선물을 요구하는 여성이, <야동을 보다가>에는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인 전 여자친구가 등장한다. 중식이 밴드가 여성을 노래 속에 등장시키는 일관된 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이 ‘중식이 밴드는 여성혐오 밴드다’라는 결론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래 속 인물의 여성혐오적인 행동이나 발언은 우선 작품 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노래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러한 인물들을 설정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성혐오적 화자의 등장을 여성혐오로 간주하면 이 세상에는 어떤 작품도 만들어질 수 없다. 살인, 폭력, 폭언, 마약 등의 내용이 포함된 영화나 책 또한 모두 금지되어야 한다.

전 여자친구의 리벤지 포르노를 보면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외로움 탓을 하는 화자의 모습은 우스꽝스다 못해 폭력적이다. 얼마 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된 ‘웹하드 카르텔’은 디지털 성범죄가 얼마나 만연한 사회인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가사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물론 이후 그는 사과문에서 ‘여자를 혐오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며 ‘여자친구를 엄청 좋아합니다. 동거녀로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습니다. 저희 엄마도 좋아하고 누나도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이를 감안한다면 의도된 창작이라는 해석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성혐오에 대한 지적에 ‘저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라는 답변을 내놓았다는 건 ‘여성혐오’를 ‘여성을 혐오하는 것’, ‘싫어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이해의 부족, 이해하려 하지 않는 태도는 음악 외의 창작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소설가 김훈 또한 「언니의 폐경」에서 여성의 생리를 비현실적으로 묘사해 비판을 받았다. 이후 “나는 어떤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여자를 묘사하는 데에 매우 서투르다. 여자를 생명체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것이 비판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여성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려진 창작물에 대한 합리적 비판은 창작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래서 중식이 밴드의 노래를 선거송으로 사용한 정의당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어떤 밴드의 음악이 정당의 로고송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노래가 가지게 되는 의의를 정의당은 미리 고려했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써의 표현의 자유는 항상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중식이 밴드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라가 아니라 ‘중식이 밴드의 의도된 창작이 아니더라도, 리벤지 포르노를 거리낌 없이 보는 장면은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 음악을 여성혐오적이라는 이유로 제한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창작물에 대한 비판에 뭉뚱그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비판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시도와 같다. 합리적인 주장인가에 대한 논쟁이 시끄럽고 불편하게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창작자이자 시민이라면 비판과 논쟁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창작에도 예외가 없다. 무제한의 자유가 보장되는 성역의 공간은 없다.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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