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오피니언타임스=시언] 완성된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를 다시 읽을 때마다 나는 묘한 이질감과 부딪친다. 나를 소개하고자 쓴 자소서였으나, 자소서 속의 나는 낯설었다. 자소서에 담긴 내용이 전부 ‘사실’이긴 했다. 1년간 기자단 기자로서 매주 기사를 썼으며, 몇몇 작문 대회에서 입상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실’들의 나열은, 내 삶에 관한 ‘진실’을 얼마나 잘 대변해 주고 있는가. 이게 정말 나이긴 할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소서 작성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갖출 것과 읽는 이가 흥미 있어 할 소재를 담고 있을 것이 그것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 자소서가 아닌, 모든 글쓰기의 대원칙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다. 전자는 맞다. 하지만 글감 선택에 있어 자소서만큼 읽는 이의 흥미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글은 흔치 않다. ‘읽는 이의 흥미’라는 조건은 소재의 취사선택으로 이어진다. 눈에 띄고 긍정적이었던 경험은 선택되고, 그렇지 못한 경험은 축소되거나 삭제된다. 내 인생에 관한 진실은 보잘 것 없고 아둔했던 그 시간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픽사베이

이런 과정을 통해 작성된 자소서가 10편을 넘어가면 이상한 자괴감이 고개를 든다. 모니터 속 나는 명확한 목적의식과 치밀한 계획 하에 삶을 개척해온 청년인데, 이 글을 쓰는 나는 감지 않은 머리에 다 늘어난 후드티 차림의 백수에 불과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이라도 한편 읽을까 싶지만 동문들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알리는 현수막이 부담스러워 그마저도 관둔다. 집 밖은 폭염, 가슴 속은 가뭄이다.

푸석푸석하게 말라가는 마음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자기가 물을 주는 걸 게을리 해놓고
(중략)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이바라기 노리코,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시간을 내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한 건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를 읽은 후였다. 세상 전부로부터 도망칠 순 있어도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나는 나였고, 메마른 내 마음에 물을 대는 것도 나의 일이다. 농부가 잡초 가득한 밭을 변명치 않듯, 너무 바빴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소서를 쓰는 시간이 노력과 발전을 거듭했던 경험의 서술이라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은 애썼으나 실패했고, 미숙했고 번민했던 나머지 시간을 어루만지는 과정이었다. 괜찮아, 그땐 그게 최선인 줄 알았잖아, 잘 견뎠어하고 갈라진 가슴에 물을 주는 시간이었다.

철학자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에 대한 사랑을 말했다. 주어진 팔자와 사회적 조건, 과거의 과오 등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 안에서 네가 펼칠 바를 펼쳐가라는 당부인 것이다. 니체의 말이 ‘진술’이 아닌 ‘당부’인 이유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가뭄의 폭정은 계속될 것이므로, 나의 물주기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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