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영인의 정화수(井華水)]

[오피니언타임스=도영인] 사랑이란 단어는 삶이 가져다주는 오묘한 맛을 오롯이 느끼게 하는 언어 중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제일 값비싼 말이 아닌가 한다. 여름철에 건강에 좋다는 오미자주스처럼 누구나 살면서 느끼는 인생의 여러 가지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등 간단하지 않은 삶의 존재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많은 혼란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에서 나오는 신비스러운 마력에 이끌려 누구나 사랑의 맛을 갈구하게 된다.

사랑을 영어로 하면 love인데 영어권 사람들은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랑해’라는 등 이 말을 추상적 관념과 관계없이 감각적 언어표현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자신이 의도하는 그대로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이 사람이던 음식이던 그 대상에서 오는 좋은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말을 남발한다. 한국인 정서에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표현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그냥 가볍게 좋아하는 관계가 아닌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는 ‘I love you’를 입에 달고 산다. 어느 문화권에서든지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어로 미워한다는 말도 싫은 사람이나 달갑지 않은 상황에 똑같이 적용한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투정을 하면서 ‘I hate you’하거나 ‘I hate spinach’ 할 때 미워한다는 이 표현은 단순하게 사랑의 반대표현으로 쓰인다.

그와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영어문화권과는 달리 보다 엄숙(!)한 의미로 쓰이는 듯하다. 적어도 간장게장을 너무나 사랑한다거나 미지근한 물을 정말 미워한다고 말하는 한국 사람은 보지 못했다. 요사이 조금이라도 언어느낌을 강조하고 싶을 때 ‘격하게 환영한다’ ‘격하게 감사한다’는 등 애써 힘주어 말하는 표현도 있는데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는 말의 중압감이 없이 단순히 좋고 싫고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 ‘격하게’라는 말을 덧붙여 쓰는 것 같다.

ⓒ픽사베이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는 말은 수천 년을 거쳐 발달되어온 정신문화배경을 가진 한국인들 사이에서 조금 더 신중하게 사용되고 있는 편이다. 사랑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은 몸이 불러일으키는 표피적인 감각보다는 온몸을 통해 발산되는 인간생명력을 핵심적으로 관할하는 심장 속에 깊이 뿌리내린 단어라고 생각한다. 순수 우리말인 사람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소리에서 나오는 파장에너지마저도 아주 비슷하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공간 차이와 온갖 장애를 뛰어넘는 여성과 남성 간의 사랑도 있겠으나 자식사랑이 발휘하는 힘은 동물세계에서조차 더욱 더 각별하다. 죽은 새끼를 품고 대양을 2주일 넘게 헤엄치고 다닌 엄마고래 사진을 접하고 사람들은 그 동물적 모성애에 감탄해 마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짝짓기에 필요한 동물적인 수준을 능가하는 사랑에 있어서도 동물의 영장답게 훨씬 더 의미심장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에게 이로운 상황이 아닐 경우에 싸우거나 달아나는 결정을 본능적으로 하게 하는 대뇌변연계가 발달한 파충류같은 동물과 달리 인간두뇌는 훨씬 더 복잡하게 진화했다. 자신에게 위험한 상황에서도 두뇌의 신피질, 특히 전두엽이 발달한 인간은 본능적 충동이나 두려움을 억누르고 자기희생적인 자아초월성을 발휘할 수 있다. 사실 인류역사를 뒤돌아보면 현세기에 들어선 뒤에도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지탄받는 폭력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고 집단적으로 조직화된 잔혹행위인 전쟁을 합리화해 온 피 묻은 인간사가 지속되어 왔다. 보다 인간답게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자기보호와 이익추구본능에 가리어져 동물세계 못지않은 잔혹한 행태에서 졸업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현재 인류가 가진 집단의식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사랑을 하고 싶어 하고 그 때문에 일생을 다 바쳐 큰 사랑의 대가를 치루기도 한다. 적어도 사람들이 동물세계에서보다는 훨씬 더 깊이 있고 폭넓은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기초월적 본성, 즉 영성적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자 하는 본질적 인간욕구야말로 온전한 삶을 추구함으로써 최상의 자아실현을 달성하려는 인간적 본성이다.

그런데 이 최상의 자아실현적인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인간적인 사랑은 단순히 감성적 차원에서 혹은 무조건 합리적 수준에서만 달성될 수 없다. 최고수준의 감성능력과 탁월한 이성적 힘을 동시에 발휘하여 사랑을 성공적으로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랑한다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어찌해야 제대로 잘 실천할 수 있을까?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말을 하기 전에 고려해야 하는 ‘세 가지 걸러내기 시험(triple-filter test)' 장치를 고안해냈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것이 진실이고, 선하거나 친절하고, 유용하거나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소크라테스의 이 가르침은 일종의 진선미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서양문화권에서 보다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사랑한다”라는 무수한 말들이 이 진선미 시험 장치를 통과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차라리 한국사회에서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쏟아내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할 수도 있겠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세계 최상위권에 속하는 ‘개발국가’에 몸담고 있는 한국인들은 21세기 글로벌사회에서 국가와 지역사회 그리고 사회계층과 같은 여러 가지 경계선을 넘어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쉽사리 공유할 수 있는 SNS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촌 대다수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연결된 이 멋진 21세기에 사람들은 수많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온갖 정보를 퍼 나르면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모든 말과 정보들이 진선미 걸러내기 시험을 거쳐야한다면 과연 몇 퍼센트나 통과할 수 있을까 의심해 볼 수 있다. 진실하지 않고, 선하지 않고, 유용하지 않은 말을 안 하는 것도 성실하게 살기 위한 좋은 전략이겠으나, 이왕이면 진실하고 선하고 유용한 말을 훨씬 더 자주 하고 산다면 세상에 더욱 유익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비인간적인 폭력과 무자비심, 그리고 복수심이 무분별하게 넘쳐나는 세상에서 누구나 고민해 볼 만한 일이다.

일상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기 전에 정말로 사랑을 잘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해 통찰해 볼 때 매우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던 한 여성은 자기의 감성적 표현능력이 매우 낮다는 평가를 동료들로부터 받고 충격을 크게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평소에 어떻게 하면 좀 더 온전한 삶을 잘 살 수 있을지, 더욱 효과적으로 사랑하고 성공적인 조직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신디 위글워즈(Cindy Wigglesworths)는 결국 사랑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가지 핵심요소를 균형 있게 실천하는 실질적 능력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사랑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날개를 가진 새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iNlBrovxrOA).

단순한 정보가 유용하게 쓰이려면 체계를 갖춘 지식형태로 발전해야 하고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일단 다양하게 축적된 지식세계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이 자동적으로 행복하게 되거나 원만한 인간관계를 즐기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지식을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 현자라고 할 수 있고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은 분명히 이 지혜라는 덕목을 갖고 있다. 지식이나 교육수준이 높은 부모들조차도 소위 ‘자식 농사’에서 곧잘 실패하는 이유는 지혜롭지 못하게 사랑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한국 부모들은 유난스럽게 자식사랑에 취약한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사회문제이다. 영어로 ‘피 흘리는 가슴을 가진 민주당사람들(bleeding-heart liberals)’이라는 표현이 한국사회의 경우에는 진실성이 결여된 정치인들에게보다는 오히려 자식을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하는 부모들에게 더 자연스럽게 적용된다고 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위해 ‘피를 철철 흘리는 가슴으로’ 자식을 사랑한 부모들이 반드시 사랑의 필수조건인 지혜를 충분히 발휘했다고 볼 수 있을지 집단지성적인 차원에서 통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랑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날개를 갖고 날으는 새와 같다고 표현한 신디 위글워즈는 자비(compassion)를 높은 수준의 공감능력으로 보았다. 사랑의 반대개념인 무관심이 아닌 동정심보다도 높은 수준이 공감능력이라면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의식수준이 실천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자비라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던, 장애인이나 저소득층 등 소위 ‘취약계층’이 고통스럽게 경험하는 삶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는 공감능력이던, 감성지능적인(emotionally intelligent) 차원에서 무관심한 것보다는 훨씬 높은 의식차원이다. 그러나 타인을 막연하게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그 아픔을 함께 느끼는 감성지능을 갖는 것 자체는 개인적 혹은 사회적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순한 공감능력 또는 감성지능적인 반응을 진정한 의미의 자비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실천의 힘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식민지시대에서 벗어난 민족의 광복이라는 빛나는 기쁨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한 채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쟁, 독재와 폭력, 물질주의적 무한 경쟁이라는 무자비한 시대를 겪어내었고 이제 겨우 촛불시민혁명을 거쳐 민주적인 집단지성이 깨어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무조건적인 적폐청산을 외치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민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지혜와 자비라는 두 날개가 각자의 의식세계에서 얼마나 자라나고 있는지, 아니면 앞으로 얼마나 더 튼튼하게 균형 잡힌 날개로 키우고 싶은지 각자 성찰해 볼 때이다. 이 무덥고 숨 막히는 한국강토 하늘 아래 필자는 아름다운 사랑의 새들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청명하게 드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꿈을 매일 밤 꿈꾼다. 비록 아주 작은 평범한 참새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내 작은 두 날개도 크고 듬직한 청학들이 크게 펼친 멋진 날개들과 어울려 함께 춤추는 꿈을 꾼다. 

도영인

한 영성코칭연구소장
영성과 보건복지학회 고문, 시인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