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렬의 맹렬시선]

[오피니언타임스=이명렬] 가고시마. 왠지 가고 싶게 만드는 일본 규슈 섬 남부의 도시다. 가고시마에 도착한 이방인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잿빛 화산재다. 검은 모래가 도시 곳곳을 휘덮고 있다. 화산재의 주인은 가고시마 항구 건너편의 사쿠라지마 화산섬이다. 제주도 같은 휴화산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활화산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용암이 이글거리는 거친 화산은 아니지만, 빈번히 분화하며 화산재를 바다 건너 도심으로 배달하는 성실한 화산이다. 내가 도착한 날에도 화산은 연신 잔기침을 하고 있었지만, 현지인들은 시큰둥하며 제 갈 길을 갔다. 활화산을 마주하고 사는 삶. 그들의 하루는 얼마나 뜨거울지 자못 궁금해졌다.

ⓒ이명렬

가고시마에 간 것은 현지에서 JET 국제교류원 업무를 하던 친구 때문이었다. 국제교류원은 매년 일본 대사관에서 선발 시험을 거친 후 각 지자체에서 통·번역, 자매도시, 한국어강좌, 관광 홍보 등 다양한 국제 교류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지역 배정 방식이다. 지원자가 선호 지역을 써내긴 하지만 결원이 생긴 지자체에서 직접 선발하기에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다.

일본 열도는 생각보다 길다. 북단 홋카이도부터 남단 가고시마까지 무려 1900km나 된다. 원전 사고가 터진 후쿠시마 지역이 아니길 바라던 친구에게 배정된 지역은 이름도 낯선 가고시마였다. 인연이라는 것은 지독히도 불확실하지만 그래서 더욱 역동적이다. 어릴 적 즐겨 하던 부루마불 게임에서 내가 던진 주사위는 항상 엉뚱한 도시나 무인도를 향하던 것처럼, 삶의 주사위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주사위를 던진다. 이번엔 황금열쇠이기를 바라며.

국제교류원을 하던 친구 덕분에 현지에서 일본인 친구 2명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 관심이 많던 토모짱과 유카리짱이었다. 처음 만나자 마자 유카리짱의 차에 탔고, 운전을 맡은 유카리짱은 더 좋은 곳으로 놀러 가자며 규슈 최남단인 이부스키로 핸들을 돌렸다. 난 일본어를 전혀 못했고, 토모짱과 유카리짱도 한국어는 서툴렀다. 친구가 중간에 통역을 해주긴 했지만, 대부분 손짓, 발짓과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얘기를 나눴다. 언어의 장벽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남국의 햇살과 바닷바람은 매혹적이었고, 젊은 우리는 꽤나 들떠 있었다. 검은 화산 모래로 유명한 온천에서 모래찜질을 하고, 흐르는 물에서 소면을 건져 먹는 나가시 소멘도 먹었다. 무슨 맛이었는지, 어떤 얘기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많은 얘기가 오갔고 저녁 무렵에는 무척이나 아쉬워졌다. 가고시마 사람은 꽤나 뜨거웠지만 데일 정도는 아니었다. 온돌처럼 주변 사람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안정적인 온기. 화산 옆에 사는 이들은 열정을 다스릴 줄 아는 듯했다.

ⓒ이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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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박 6일의 짧은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 넷은 다시 만났다. 함께 저녁을 먹고 2차로 포장마차 거리로 향했다. 사람이 붐벼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2012 런던 올림픽 기간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올라간 축구 4강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옆자리 일본인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축구를 봤다. 가고시마 사람들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술기운인지 모르지만, 목이 터져라 ‘울트라 니폰’을 외쳤다. 애국심은 잠시 접어두고 함께 울트라 니폰을 외쳤다. 멕시코와 맞붙은 일본은 아쉽게 3:1로 졌다. 술자리는 길어졌고, 옆에서 혼자 가장 큰 목소리로 응원을 하던 료칸 사장님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은 한국에서 온 나를 위해 가고시마 특산의 고구마 소주를 주문했다. 얼음에 타서 마시니 고구마 특유의 향이 묵직하게 올라온다. 달큼하고 독하다. 술과 축구에 취한 사장님은 말이 많았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즐거웠다. 가게가 문을 닫을 무렵 료칸 사장님은 한사코 우리 테이블의 술값까지 모두 결제하고선 ‘울트라 니폰’을 외치며 유유히 사라졌다.

여행은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 친구는 경력을 살려 국제교류 관련 기관에 취직해 가고시마에 자리를 잡았다. 타지방에서 국제교류원으로 일하며 장거리 연애를 하던 애인은 아내가 되었고, 올해 아빠의 선한 눈매를 빼닮은 예쁜 딸이 태어나 세 식구가 되었다. 유카리짱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토모짱은 미혼이지만 잘 지내는 듯 하다. 가끔씩 국제 뉴스 토픽으로 사쿠라지마 화산 분화 소식이 나오면 괜스레 웃음부터 나온다. 현지 사람들은 차분히 지낼 텐데 되려 해외 사람들이 더 부산스러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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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에 잠시 들른 친구에게 고구마 소주를 부탁했다. 세계주류품평회에서 금상을 받은 혼보주조의 술이라고 했다. 집에서 아내와 함께 얼음을 넣고 마셨다. 여전히 독하면서 달다. 몸이 은근히 달아오른다. 가고시마의 술, 사람, 환경은 나를 뜨겁게 만든다. 열기로 가득 찬 한증막이 아니라 따스한 온천수다. 샤워기의 냉수와 온수 사이에서 내가 원하는 최적의 각도를 찾은 느낌이다. 난 가고시마의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따스한 온도가 좋다. 가고시마에 가고 싶다. 

이명렬

달거나 짜지 않은 담백한 글을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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