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난중일기>와 조선 수군 재건로를 통해 생각해보는 명량해전의 의미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우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명장으로 평가되는 이순신(1545∼1598)은 여러모로 특별한 인물이다. 그의 승리 요인은 학자들마다 해석이 다르고, 또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흔히 이순신을 설명할 때 23전 23승의 화려한 승리만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전승의 행렬은 크게 ‘적의 내부를 알고, 유리한 장소에서 전쟁을 벌이며,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이순신의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전투가 ‘한산도 대첩(1592)’으로, 대부분 ‘학익진’을 기억하는 이 전투의 중요한 요소는 판옥선이 회전이 가능하다는 점. 이를 이용해 적을 격멸한 위대한 승리였다. 이는 전투에 앞서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했던 이순의 성격이 잘 드러난 것으로, <난중일기>를 보면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병사의 수가 적다는 점이 이러한 경향을 반증한다.

현충사에 모셔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 ⓒ김희태

하지만 명량해전의 경우 위의 요소들이 적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자신 조차 천행이었다고 할만큼 확신할 수 없었던 전투였다는 점에서 극적인 장면까지 갖추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명량해전을 다룬 대중매체는 많았는데, <불멸의 이순신>과 <명량>이 대표적이다. 대체로 명량해전의 첫 시작은 정유재란의 발발과 함께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는 부분에서 시작한다. 왜군의 재침이 본격화되면서 조선 조정은 요시라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순신에게 부산포로 진격해 가토 기요마사를 잡을 것을 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이순신의 탄핵이 이루어졌다. 조정을 기망하고, 군왕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은 하루아침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죄인의 신분으로 한양으로 압송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변씨가 아들을 만나겠다고 올라오던 중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아픔을 겪게 된다.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 소재한 원균 장군 묘. 그의 무능으로 인한 칠천량 해전의 패전은 2만의 조선 수군과 함대가 괴멸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김희태

그나마 판중추부사 정탁(1526∼1605)이 <신구차>를 통해 이순신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고, 이제까지의 전공이 감안이 되었기에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백의종군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이순신은 그렇게 다시 전장이 있는 남해안으로 길을 나섰다. 이순신 생애의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7월 18일, 이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16일 새벽에 있었던 칠천량 해전(1597)에서 조선 수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때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이순신은 망연자실하며 통곡했는데, 이때의 통곡은 그간 조정의 지원이 없이 그동안 힘들게 일구었던 조선 수군과 함대가 모두 사라졌다는 인간적인 측면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원수 권율(1537~1599)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직접 이순신을 찾아왔다. 이때 이순신은 “직접 해안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라며 적정을 살피고, 대책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이때 조정은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가 알려지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결국 이를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은 이순신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파직한 행위에 대해 이순신에게 사과해야 할 만큼 정치적으로 위축되었으며, 다시금 이순신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된 곳은 정개산성 건너편에 있던 손경례의 집으로, 이곳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비석이 세워져 있어 그 날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손경례의 집에 세워진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비. 이곳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 ⓒ김희태

손경례의 집을 시작으로 명량해전(1597)이 있기까지 이순신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된 뒤 육로로 이동을 하면서 군량과 병장기, 군사들을 모으는 것 이외에 그곳에서 만난 백성들을 위로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칠천량 해전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열두 척의 함대를 기반으로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순신의 생각과 행동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우선 난중일기에서 나타나는 8월 3일에서 9월 16일 명량해전까지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명량으로 가는 길, 조선 수군 재건로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된 이순신은 그날부터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이순신과 그의 일행(이하 이순신)은 말을 타고 구례로 향했다. 지금의 구례군 토지면에 자리하고 있는 ‘석주관성’에 도착했을 때 구례현감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을 하고 지키다가 이순신을 보고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 저녁에는 구례현에 도착했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피난을 간 탓에 “경내는 쓸쓸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손인필은 이순신이 도착하자 곡식을 지고 와서 만났는데, 지금도 구례군에는 손인필 비각과 이순신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구례읍사무소에는 ‘명협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구례현청의 자리로 이순신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8월 3일, 기복수직교서를 받은 뒤 구례현청에 도착한 이순신 장군. 당시 구례현청의 자리가 지금의 구례읍사무소다. ⓒ김희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압록. 지금의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과거 압록유원지가 있던 곳이다. ⓒ김희태

8월 4일, 아침식사를 마친 이순신은 구례를 출발해 곡성으로 향하게 되는데, 도중에 ‘압록’에 도착해서 점심도 먹고 말의 병도 고쳤다. 압록은 지금의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압록유원지에 해당한다. 이어 오후에는 곡성현청에 도착했지만, 이곳 역시 백성들이 피난을 해서 경내는 비어 있었다. 5일에는 옥과현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옥과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 피난하던 백성들이 이순신이 왔다는 소리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을 위로했던 이순신, 이러한 행적은 다른 곳에서도 쉽게 보이는 대목으로 당시 백성들이 이순신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피난민들로 가득했던 옥과경은 지금의 곡성군 삼기면에 있는 삼기삼거리로, 이날 저녁 이순신은 옥과현에 도착해서 6일까지 머무르게 된다. 당시 옥과현청의 자리는 지금의 곡성군 옥과면에 있는 설산정 공원이다.

피난민으로 가득했던 옥과경. 지금의 곡성군 삼기면에 있는 삼기삼거리다. ⓒ김희태
대황강에서 바라본 모습. 현재 능파정은 사라지고,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김희태
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 위치한 부유창 터.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에 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희태

8월 7일, 옥과를 출발한 이순신은 순천으로 향하는데 길을 가는 도중 선전관 원집을 만나 선조의 유지를 받고, 그날 저녁 곡성의 강정에 도착해서 유숙하게 된다. 강정은 곡성군 석곡면으로 이곳에는 ‘능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능파마을의 유래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8일 새벽에는 강정을 출발해 ‘부유창’에 이르렀는데, 지금의 순천시 주암면 창촌리가 부유창이 있던 곳이다. ‘창(倉)’이란 조세로 받은 쌀을 보관하는 곳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식량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부유창이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저녁 무렵 남문을 통해 순천으로 들어선 이순신의 눈에 비친 순천은 ‘인적도 없고 적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안향교. 낙안을 지나던 이순신 장군은 백성들과 마주하게 된다. ⓒ김희태

8월 9일, 아침에 순천을 출발한 이순신은 낙안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이 온다는 소식에 흩어진 백성들이 모여 이순신을 맞이했는데, 지금의 낙안향교다. 이처럼 백성들이 흩어진 사례는 이미 전라남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순신이 싸운 상대는 왜군도 있었지만, 이보다 백성들의 두려움과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전투의 양상을 보인다. 때문에 이순신은 계속해서 육로로 이동하면서 백성들의 위로하고,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이날 저녁 이순신은 보성의 ‘조양창’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부유창과 달리 군량이 온전히 보전돼있어 이를 수습할 수 있었다. 조양창은 지금의 보성군 조성면에 있는 고내마을로, 이 날부터 10일까지 몸이 불편한 이순신은 그대로 김안도의 집에서 유숙을 하게 된다.

조양창이 있던 고내마을.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 있던 군량을 수습하게 된다. ⓒ김희태
보성군 득량면의 박실마을. 8월 11일부터 4일간 이순신 장군은 양산항의 집에 머물게 된다. ⓒ김희태

8월 11일, 아침에 박실마을에 있는 양산항의 집으로 이동을 했다. 박실마을은 보성군 득량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이순신은 4일간 머무르며 장계의 초안을 잡고, 전쟁의 상황을 접하게 된다. 14일에는 어사 임몽정을 만나기 위해 보성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유숙했다. 15일에는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이 선조의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 유지는 조선 수군을 폐지하고 육지에 합류해 싸우라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조선 수군 폐지론으로 이에 대해 이순신은 수군 폐지의 불가를 주장하며,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로 알려진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의 장계를 올리게 된다. 당시 이러한 장계로 인해 수군의 폐지를 막은 것은 훗날 명량해전의 승리를 생각할 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수군 폐지의 유지를 받았던 ‘열선루’는 현재 보성군 보성읍에 있는 보성초등학교의 자리로, 현재 보성군청에는 열선루의 초석과 석재 일부가 전시되고 있다.

보성군청에 있는 열선루의 초석. 옛 열선루가 있던 곳은 지금의 보성초등학교 자리다. ⓒ김희태
군학마을에 소재한 군영구미.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배를 타고 장흥으로 이동하게 된다. ⓒ김희태

이후 이순신은 17일 아침 ‘백사정’에 도착했다. 백사정은 현재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에 자리한 명교 해수욕장으로 이곳에 도착한 이순신은 점심을 먹고, 이어 ‘군영구미’가 있는 회천면 전일리로 향하게 된다. 이미 이순신이 도착했을 때 경내는 무인지경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배를 보내지 않아 군학마을에서 하루 머물게 된다. 이어 18일 배설이 남긴 열두 척의 함대를 인계받게 된다. 당시 열두 척의 함대를 인수했던 회령포는 현재의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로 이곳에는 회령진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과 ‘회령포 결의’를 하게 된다.

열두 척의 함대를 인수한 회령포. 본격적인 조선 수군의 재건이 이루어지다. ⓒ김희태
어란 여인의 이야기가 전하는 어란리. 이진을 거쳐 어란진에 머무른 이순신 장군, 이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게 된다. ⓒ김희태

 

20일에 회령포의 포구가 작아서 이진으로 진영으로 옮겼다. 이진은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로 이곳에는 당시 세워진 이진성지가 남아 있다. 이 시기 이순신은 곽란과 통증으로 고생했으며, 23일에는 육지로 나와 잠을 청해야 했다. 24일 이진을 출발하여 어란진으로 이동을 한 이순신은 28일까지 머무르게 된다. 이때 이순신은 왜적이 왔다는 허위 정보로 인심을 어지럽힌 당포의 포작을 처형하고, 왜적이 이르렀다는 정보를 접한다. 한편 적선 여덟 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적극적으로 뒤쫓아 적선이 물러가게 했다. 29일에는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게 되는데, 벽파진은 지금의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다.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9월 15일까지 머물게 된다.

벽파진에 세워진 이충무공 벽파진 진첩비(진도 향토유적 제5호)의 모습 ⓒ김희태
고뇌하는 이순신 상에서 바라본 모습. 열세 척의 함대로 열 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싸운 현장인 울돌목. 명량해전의 서막이 오르다. ⓒ김희태

 

9월 14일 임준형이 적선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다고 보고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진영을 다시 전라우수영으로 옮기는데, 전라우수영은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 위치한 곳. 지금은 해남군과 진도군을 잇는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에서 운명의 전투가 벌어질 터였다. 이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으로, 단 열세 척의 배로 그 열 배가 넘는 왜군의 함대와 맞서 이겨낸 위대한 승리이자, 칠천량 해전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했던 분기점이 된 전투였다.

■ 신화가 아닌 현실의 역사로 기억해야 할 명량해전

이처럼 명량해전의 승리를 두고 우리는 통상 기적과 같은 승리 내지는 신화라는 표현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선 이순신 장군의 파직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된 이후의 행적을 볼 때 이순신 장군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은 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왜적을 상대하기에 앞서 적정을 치밀하게 살피고, 적을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명량해전은 우연히 얻어진 승리가 아니었다. 선조가 내린 ‘수군 폐지론’만 해도 그렇다. 이순신은 이미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군왕을 기망했다는 이유로 한 차례 파직을 경험했었기에 보통의 장수였다면 왕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수군 폐지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수 고소대에 세워진 타루비(보물 제1288호).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만든 비로 서, 남해안 지역으로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김희태

한편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이순신이 지나갔던 구례와 곡성, 순천과 보성, 장흥과 해남에 이르는 여정은 단순히 병장기와 곡식을 수습하는 것 외에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 소식이 들리자 관군들은 도망치기에 바쁜 가운데 피난길에 오른 백성들에게 이순신의 존재는 남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열두 척의 배를 인수하기 위해 바로 배를 타고 회령포로 이동할 수 있었음에도, 왜군과의 조우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육로로 이동을 했던 측면에는 이러한 생각을 읽어낼 수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명량해전은 이순신이라는 탁월한 지휘관 이외에, 이순신과 함께 한 장수들과 병사, 백성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현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아산에 소재한 이순신 장군의 묘. 명량해전이 신화가 아닌 현실의 역사인 점은 조선 수군 재건로를 통해 알 수 있다. ⓒ김희태

지난 2016년 리우 올림픽의 펜싱 국가대표 박상영이 패색이 짙던 상황에서 “할 수 있다”를 연이어 말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며 큰 감동을 안겼다. 이후 패색이 짙던 경기를 뒤집어 극적인 역전승을 이룬 장면은 당시 올림픽의 명장면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당시 이순신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모두가 “안 된다"라고 포기할 때, 그럼에도 “할 수 있다”라고 외치던 이순신의 말과 행적을 <난중일기>와 조선 수군 재건로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 할만하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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