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연의 하루 시선]

여행의 시작

7월,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를 챙긴 딸과 그의 부모님이 인천공항에 들어섰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조차 혼자 다녀본 적 없는 딸이 홀로 23박 24일의 해외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 혼자 보내는 외국여행이 내심 걱정되는 듯 아빠는 공항은 어떻게 이용하고 경유는 어떻게 하는지, 해외에서 어떻게 다녀야하는지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엄마는 빠진 물건은 없는지, 기초 회화는 할 수 있는지, 숙소 주소는 알고 있는지 내내 걱정하다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표 취소해도 된다’며 딸의 결심을 회유해본다. 엄마의 권유에 잠깐 흔들리기도 했던 딸은 마음을 다잡고 두려움과 막막함을 가득 안은 채 출국 심사를 받으러 간다.

초반의 두려움이 무색하게도, 긴 시간을 지나 독일에 도착한 딸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설렘도, 두려움도 없이 그저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데 유심이 안 터져 짜증이 날 뿐. 결국 여행 첫 날부터 휴대폰 인터넷이 안 돼 지도 없이 숙소를 찾아가는 미션이 주어졌다. 그렇게 험난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유심 문제부터 소매치기, 인종차별, 캣콜링, 바가지 등 불쾌한 일과 새로운 건축물, 사진으로만 보던 예술작품 감상, 새로운 시민문화, 예상보다 포근하던 숙소와 아름다운 야경 등 즐거운 일을 골고루 겪고 안전히 한국에 도착하며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그 중 유난히 기억하고 싶던 몇몇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프라하다. 체코의 수도, 사람들로 붐비는 관광도시, 그리고 민주화의 중심.

바츨라프 광장 ⓒ픽사베이

프라하의 봄

‘프라하에 왔으니 관광지는 둘러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아침 일찍 거리에 나섰다.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걷다보니 도착한 광장.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첫 인상은 눈부셨다. 해를 보며 걸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광장은 더 거대해보였다. 체코에 대한 역사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만난 바츨라프 광장은 그저 크고,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고,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기대하지 않고 왔지만 기대보다 더 별 거 없던 광장을 산책하고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렇게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를 떠날 때까지 감흥 없는 곳 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팁 투어에 참여해 바츨라프 광장을 다시 가게 됐다.

체코 역사엔 오스트리아의 강점, 나치의 강점, 그리고 소련의 강점이 있었다. 그 중 소련 지배 당시의 체코, 체코슬로바키아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안토닌 노보토니가 당 제1서기를 맡고 몇 년 후 대통력 직까지 맡았지만 국민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노보토니는 사람들이 원했던 빈익빈 부익부를 해결하고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주의가 아닌 권력을 위한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가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는 슬로건과 함께 자유화를 추진한다. 소련 치하 국가 중 가장 먼저 개혁의 바람이 분 것이다. 하지만 소련 정부와 체코슬로바키아 주변 나라들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민주화는 실패하는데 이때가 바로 프라하의 봄이다.

8월 20일, 체코 사람들은 탱크 소리에 잠을 깬다. 바츨라프 광장에 들어와있는 수십만의 군대와 200대의 탱크를 본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남녀노소 나와 손을 잡고 탱크를 막는다. 아무 죄 없는 시민에게 발포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발포 명령이 떨어진다. 군인들은 이미 공항을 통제하고 전화선과 전기를 끊어 프라하를 고립시켜놓은 상황이었다. 탱크 위에서 체코 학생이 피 묻은 국기를 흔드는 모습을 미국 기자가 사진 찍는다. 그리고 다음 날 기사가 뜬다. “과연 프라하의 봄이 올 것인가?” 프라하의 봄이었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과 달리 실제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프라하의 봄은 실패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상화가 이뤄진다. 연극배우와 연극 작가, 지식인들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비밀경찰은 늘어난다. 도청이 늘어나고 사람들은 서로를 못 믿게 된다. 소설 1984의 이야기 같지만 바로 소련이 말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상화’였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나고, 바츨라프 광장에 위치한 까를대학 철학과 학생들이 두 번째 프라하의 봄을 계획한다. 바로 한 달에 한 명씩 분신자살로. 1월 16일 ‘팔라흐’라는 학생이 반팔을 입고 바츨라프 광장의 국립 중앙 박물관 앞에 양동이와 함께 나타난다. 양동이에 담긴 신나를 붓고 분신자살을 한다. 정확히 한 달 후 ‘자이츠’라는 학생이 분신자살을 하고, 또 한 달 뒤 ‘이브젠’이라는 학생이 분신자살을 한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 상황에 큰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후 동유럽은 20년간 그대로 소련 치하에 있다. 1980년대 들어 소련의 힘이 약해지고 폴란드에서 첫 자유혁명이 성공하자 두 번째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일어난다. 다시 시민들이 바츨라프 광장을 메우고 몇 주간 나라가 마비될 만큼 모이고 흩어지며 시위를 이어가고 결국 독립에 성공한다. 투표로 뽑은 대통령이 나오고, 자유화를 처음 얘기했던 둡체크가 다시 프라하로 오고, 국민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며 독립을 이룬 혁명. 벨벳혁명이다.

바츨라프 광장과 사람들

혹자는 여행이 반성하기 위해 다녀오는 것이라 했다. 또 어디에선가 여행은 그냥 길 위에 서있는 것이라고도 들었다. 필자는 아직 이 여행의 정체성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첫 혼자 여행이라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하나, 그 많은 어려움들을 만나고 헤쳐나간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하나, 혹은 여유를 배운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하나 하는 고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정체성을 못 정하는 와중에 인상 깊게 기억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민주화 역사를 가진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바츨라프 광장의 민주화 역사는 광화문 광장과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했다. 5·18민주화운동이 겹쳐보였고 광화문에서 열렸던 촛불 시위가 떠오르는 곳이었다. 수많은 피가 흘렀던 바츨라프 광장엔 이제 평화가 들었다. 수많은 피가 흘렀던 광주도, 눈물이 흘렀던 광화문 광장도 평화가 들었다. 촛불로 뽑은 대통령은 이산가족 상봉을 이뤄내고 종전선언을 언급한다. 대가 없는 평화는 없고 근거 없는 낙관은 없다. 가끔 인류에 대한 무한한 낙관이 들 때엔 평화를 위한 대가를 기꺼이 치루는 사람이 있기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프라하의 봄’에 희생된 사람들, 분신자살을 선택한 까를대학 철학과 학생들, 벨벳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촛불 시위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시위를 함께 한 우리들같이. [오피니언타임스=정수연] 

정수연

사람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이해하고 싶어 글을 씁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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