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성의 일기장]

[오피니언타임스=김우성] 어느 일요일 저녁, 특별한 약속이 없어 집에서 쉬고 있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무얼할까 고민하던 중 휴대폰 주소록을 둘러보았다. 정확히 185개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심심한데 전화나 해볼까?’

주소록에 적힌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천천히 훑었다.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선배, 군대 동기, 교회 청년부 형제자매, 선생님, 친척, 이웃, 그 밖의 아는 사람이 휴대폰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가한 주말 저녁 편한 이야기 상대로 누가 좋을지 고민하면서 화면을 계속 넘겼다. 하지만 이름을 살피는 내내 과감하게 통화 버튼을 누를 용기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결국 탐색을 마친 나는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고 그대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픽사베이

언제부터 잘 지내는지 묻기가 이렇게 조심스러워졌을까? 심오한 철학을 논하는 것도, 무리한 부탁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그저 잘 지내는지, 밥은 먹었는지 가볍게 안부를 물으면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려고 했을 뿐인데. 한 때 매일 얼굴을 보면서 지낸 적도 있고, 밥을 같이 먹은 적도 있었던 만큼,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추억이 있는데. 중간에 사이가 틀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언제 만나도 활짝 웃으면서 반길 사람들인데 말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연락이 안 온다면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한테 관심이 아예 없거나, 관심이 아주 많거나. 관심 없는 대상에게 연락을 안 하는 건 당연하다. 쓸데없이 말 섞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으니까. 하지만 관심이 아주 많은 대상,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이 지금 자고 있을지 모르니 깨우기 미안해서, 혹은 바쁠지도 모르니 귀찮게 하기 싫어서 그렇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깊이 배려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연락하기가 더욱 조심스럽다.

여행을 가면 기념품 가게에 들르고는 한다. 다양한 종류의 기념품 가운데 관광 명소의 그림이 그려진 접시를 산 적이 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접시에 음식을 담아 본 적은 없다. 너무 귀해서 함부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기념품으로 산 접시를 깨끗한 상태로 보관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일반 가게에서 파는 평범한 접시였다면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았을 텐데. 부담 없이 스파게티를 해먹고 김치부침개를 올려놓았을 텐데. 기념품으로 산 접시를 눈으로만 감상하면서 표면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는 한다.

너무 소중해서, 너무 좋아해서, 그래서 더 건드리지 못하고, 다가가지 못하고, 연락하지 못하는 마음. 나만 그런 걸까. 내가 쓸데없이 예민한 걸까. 어렸을 때는 학교 수업 마치고 친구 집에 놀러가는 게 자연스러웠다. 스무 살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휴대폰 메신저로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고, 밥 한 끼 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사람과 자주 연락하고 만나면서 지냈다면,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연락하고 만나기가 망설여진다. 상대방을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배려한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을 텐데. 그 사람이 지금 자고 있거나 바쁠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뻔뻔하게 전화를 걸었을 텐데. 그러나 너무 좋아하면 그렇게 못하겠다. 어쩌다 연락이 닿아도 상대방의 시간을 더 이상 빼앗으면 안 될 것 같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하고, 날 잡아서 밥 한 끼 하자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이런 내 자신이 바보 같다.

그동안 내가 먼저 연락을 안 해서 서운해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

“죄송해요.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요. 잘 지내시나요?”   

 김우성

고려대학교 통일외교안보전공 학사과정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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