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온다는 예감도, 오라는 초청도, 간절한 구애도 없었는데, 불쑥 들이닥쳐 희망과 의지와 다짐과 함께 살아갈 힘을 새롭게 실어주는 순간을 맞았다. 특별히 가깝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음 한편에서 잔잔한 그리움과 궁금증을 갖게 하던 지인이 보낸 짧은 문자가 그랬다.

©픽사베이

“질긴 놈이 모진 놈을 이깁니다.”

오랜만에 받은 문자였다. 취업을 했다는 소식과 함께 나이 들어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의 애환을 그녀는 이 한 문장으로 내게 전했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직종의 업무인데다 상급 직원들 대부분이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자식뻘, 여유 있게 말한대도 막내 동생뻘이라는 부연 설명에서 이 말이 나온 의미는 충분히 감지되고도 남았다.

‘모진 놈’과 ‘질긴 놈’의 구분은 읽는 순간 분별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답신으로 ‘짝짝짝’ 이라는 박수를 지체 없이 보냈다. 물론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명언일세.
우리 함께 질겨봅시다.”

질기다는 의미가 가슴을 다 밝히고도 남을 만큼 벅찬 햇덩이처럼 느껴진 것도 처음이었다. 온몸의 핏줄 하나하나가 동시에 점등된 것처럼 눈부신 열기가 그날 이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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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질기다’는 단어는 말로 해 본 적도, 글로 써 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반면 ‘모질다’는 단어는 여러 의미로 상용되어 온 것도 같다. 작품을 쓸 때 특히 고난과 슬픔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갖가지 변주를 거치며 써 온 기억이 난다. 난공불락! 대항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나 사람, 시간 등이 ‘모진’이라는 단어로 압축되고 변용되었고 때문에 부정적인 단어로 내겐 입력되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실 모질다와 질기다는 둘 다 형용사로서 거의 같은 뜻이다. 다만 모질다는 질기다가 갖고 있는 의미에 더해 ‘나쁜’ 이라는, 그것도 대부분 사람에 해당되는 직접적인 부정성을 한 겹 더 갖고 있다. 때문에 쓰기도 읽기도 꺼려지는 것은 물론 모질다는 형용사가 붙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진 놈’을 ‘질긴 놈’이 이긴다니! 쉽게 닳거나 끊어지거나 부서지지 않고 견디는 힘이 있다는 질기다는 뜻이 이렇게 아름답게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나약함의 정 반대의 말, 도전과 모험과 마침내 승리를 잉태하는 말, 그래서 희망과 의미와 감사를 수락하게 하는 말, 마침내 주인공으로 나를 서게 할 말, 질기다는 그렇게 초강력한 긍정의 의미로 나를 흔들었다.

그래서일까? 오고 있는 가을이 열정과 끈기와 용기로 무장한 단단한 심장처럼 느껴진다. 오기도 전에 기별만으로도 서늘하고 쓸쓸해서 저절로 힘이 빠졌던 가을인데 말이다.

자신을 다잡는 의지의 표현으로 지인이 보내온 짧은 문장이 이 가을 내게 온 최고의 응원이 되는 이 긍정의 확산성에 경의를 표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걸 이기는 방법은 그것들에 대항하는 내 마음과 몸이 더 질겨지면 되는 것이다. 상처 없이는 내공도 쌓을 수 없다. 모진 사람이나 상황과 대치해보지 않고선 내 의지의 단단함도 확인되지 않는다. 울어본 사람만이 남의 울음 앞에 손수건을 건넬 마음도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닥뜨린 ‘모진’ 그 무엇이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새로 시작된 지인의 직장 생활이 그녀의 의지만큼 ‘질기게’ 자신을 붙들 수 있기를 빌어본다. 그리하여 ‘모질다’는 것으로 압축되는 상급 직원들이나 분위기를 거뜬히 이겨내고 마침내 순항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것은 곧 나 자신에게도 주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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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면서 받은 상처나 괴로움, 패배의식은 상대나 상황의 탓이기보다는 나 자신의 나약함, 이 꼴 저 꼴 보기 싫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청한 포기, 홀로 독야청청을 꿈꾸는 비겁한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것이 훨씬 많은 게 불편한 진실이다.

지인은 그걸 과감히 물리친다고 선포했다. 나는 거기에 숟가락 하나를 얹는 심정으로 응원을 보낼 것이다. 나이만큼 질겨지고 무뎌지고 견뎌내는 게 잘 사는 삶이란 생각이 드는 탓이다. 그게 안 돼서 슬펐고 울었고 아팠다. 그러면서 남보다 마음결이 곱다고 자찬했고 섬세하다고 나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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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나를 찾아온 ‘질기다’는 단어에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내 몸과 마음을 대입시켜 볼 참이다. 그런 후 겨울이 오기 전 나도 누구에겐가 지인의 문장을 내 것처럼 전달하리라. [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서석화

시인, 소설가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종이 슬리퍼> /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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