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의 날아라 고라니]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한 정치인의 “이부망천” 발언으로 일상에 전념하던 부천, 인천 시민들의 어안이 벙벙했던 적이 있다. 이혼하면 부천에, 망하면 인천에 산다는 말인데 몇몇 시민들은 그 정치인을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그럼 인천에서 나고 자란 난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망한 인생이라는 거냐’라는 생각에 피식하긴 했지만 분노나 모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혼했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낙오자로 치부하고, 이를 특정 지역의 보편적 특성으로 일반화하는 무례하고 게으른 사고방식이 놀라웠을 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여수, 부산, 제주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올라온 동기들을 만났다. 나는 인천에서 왔다고 소개하니 어떤 선배가 말했다. “와. 인천에서 어떻게 우리 학교를 왔냐.” 어쩌면 이 날부터 지금까지 가깝거나 먼 사람들로부터 수 없이 지역비하 발언을 들어온 덕에 이부망천 발언에도 무덤덤할 수 있던 것 같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인천처럼 교육수준 낮은 동네에서 나름 서울에 있는 이 학교에 입학하느라 용 썼다는 의미였는데, 이어진 선배의 발언에 나는 졸업할 때까지 그를 멸시하게 됐다. “맞다. 너 수시로 왔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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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게으름을 피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자면 우리네 사회에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려 모욕감을 주고, 본인과 상대방 사이의 위계질서를 바로 세워야 비로소 안심하는 군상이 가득한 것 같다. 학력, 외모, 직업 등 다양한 요소들이 차별의 준거로 사용되지만 출신지역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는 경향은 정부의 지역균형 발전 정책과 맞물려 오히려 강해졌다. 지역균형전형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이들은 학교 커뮤니티에서 ‘지균충’이라고 무시 받고, 지역인재 티오로 공공기관에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보며 수도권 대학을 나온 선배들은 혀를 끌끌 찬다.

근로소득만으로는 계층이동이 절대적으로 어려운 요즘, 능력주의 신화는 깨진 지 오래다. 자고 일어나면 1억씩 오르는 아파트가 수두룩하다는 항간의 이야기는 과장이라지만 서울의 집값은 어느 때보다 가파르게 오르고 있고, 자본을 소유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간의 격차도 그만큼 벌어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노력에 따른 결과에 대한 집착은 너무나 강해져 작은 역차별도 용납하지 않는 예민한 세상이 됐다. 내가 100의 노력을 해서 겨우 손에 쥔 10의 결과물을 누군가가 90의 노력으로 얻는 꼴은 절대 볼 수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애초에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시정 정책들조차 역차별이라며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 와중에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같다. 계층이동이 어렵다면 내 자식들은 애초에 개천이 아닌 보다 나은 물에서 놀아야 한다.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누가 나무라겠냐마는 문제는 선을 넘는 경우다. 학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 없이 위장전입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는 놀지 말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이제 뉴스 속에만 살지 않는다. 교회조차 일부러 대도시의 대형교회로 보내는 형국이다. 이웃을 골라 사랑하는 저들을 보며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어떤 수저도 못 물고 태어난 아이들은 차별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아무런 잘못 없이 상처받는다. 비극은 차별을 받는 아이들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존중 대신 약자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도 그 부모와 같은 어른이 될 것이기에. 몸에 밴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출신지역과 입학전형으로 내게 모욕적인 발언을 했던 선배는 칼 맑스를 비롯해 수많은 사상가들의 저서를 읽으며 빈부격차와 성차별, 정경유착과 같은 구조적 부조리 앞에 신음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기말고사 답안지를 휘갈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을 4년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는 차별을 차별인지 모르고 차별했다. 말과 행동은 머리가 아닌 몸이 하는 것이기에.

인천 앞바다 갯벌 위를 조르르 기어가던 엄지손가락만한 칠게와 차이나타운의 짜장면. 내겐 그것들이 정지용 시인이 그리던 실개천과 얼룩빼기 황소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자식들이 이들을 부끄러움으로 기억하지 않도록 난 무슨 노력을 해야 할까.

고라니

칼이나 총 말고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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