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Symplocarpus nipponicus Makino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다행히 약해지고 진로도 바뀐 태풍의 여파로 한바탕 비가 내리면서 폭염이 한결 누그러지기 시작하던 9월 초 숲에 들었습니다. 유례없는 더위로 인해 깡말랐던 꽃밭이 얼마나 생기를 되찾았는지 확인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야생화의 생명력은 역시 기대 이상입니다. 올여름엔 제대로 된 꽃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들었던 애기앉은부채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여기서 저기서 올라와 찾는 이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순간 동행한 이의 표정을 살핍니다. 아주 귀하고 멋진 꽃을 보여주겠다며 손목을 잡아끌었으니, 그의 반응이 내심 궁금했습니다.

도깨비방망이 모양의 꽃차례와 타원형 불염포 등 독특한 생김새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애기앉은부채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깊은 숲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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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무슨 꽃이야? 많은 야생화가 왜소하다고 하니, 바닥에 붙을 듯 키가 작은 것은 이해하겠는데, 어떤 게 꽃잎이고 이파리는 또 어디에 있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리곤 ‘봄에 나오기 시작한 잎이 7월이 되면 다 녹아 없어지는데, 그 뒤에야 어른 손가락 2개 정도 크기의 꽃이 올라와 9월 하순까지 피며, 그 이름을 애기앉은부채라고 한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리곤 “아, 맞다. 둥근 광배(光背)까지 갖춘 게, 유명한 경주 남산의 감실부처를 닮은 것도 같고, 암튼 절에서 보는 불상의 머리 형태와 매우 흡사하다.”며 맞장구를 칩니다. 일순 ‘애기앉은부채’를 ‘애기앉은부처’로 잘못 알아들은 데서 나온 반응임을 깨닫습니다.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 조각조각마다 4장의 꽃잎과 4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갖추고 있는 육수꽃차례와, 화사한 홍색의 불염포가 돋보이는 애기앉은부채.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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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지만, 자연계에선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야생화는 다양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 천차만별의 꽃 중 하나가 바로 애기앉은부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의 후광(後光)을 닮아 불염포(佛焰苞)라 불리는 짙은 자갈색 꽃 덮개가 땅 위에 타원형을 그리며 자리를 잡고, 그 정중앙에 혹자는 도깨비방망이를, 혹자는 수류탄을 닮았다고 말하는 육수(肉穗)꽃차례가 가부좌를 틀고 있으니 누가 봐도 앉은부처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꽃차례와 불염포를 포함한 전체 꽃 크기가 5cm 안팎에 불과한 애기앉은부채가 이웃한 동무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세상사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듯 환히 웃고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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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애기앉은부채란 이름에서 짐작하듯 접두어 ‘애기’를 뗀 앉은부채라는 야생화가 따로 있습니다. 다만 형태는 비슷하지만, 꽃이 피는 시기 등 생태는 크게 다릅니다. 애기앉은부채는 개화 시기가 7~9월 여름이지만, 앉은부채는 2~3월 초봄이어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야생화로 손꼽을 정도입니다. 또 앉은부채는 애기앉은부채와는 반대로, 꽃이 핀 뒤 잎이 무성하게 납니다. 그러나 크기만 다를 뿐 많은 이들이 처음 보는 순간 앉은부처를 연상할 만큼 꽃 모양이 독특한데, 일본에서도 좌선하는 부처의 모습이라는 뜻에서 ‘좌선풀(座禪草)’이라고 부른다니, 본래의 이름이 ‘앉은부처’이었을 것이라고 일각에선 주장합니다. 영어로는 앉은부채는 스컹크 캐비지(Skunk Cabbage), 애기앉은부채는 이스트 아시안 스컹크 캐비지(East Asian Skunk Cabbage)인데, 이는 잎이 배추처럼 무성하고 넓다는 특징을 반영한 결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부채처럼 잎이 넓어서 처음부터 ‘앉은부채’로 불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큰 나무 밑동에, 그리고 커다란 바위틈에 각각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든 듯 꽃을 피운 애기앉은부채.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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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생김새만 독특한 게 아닙니다. 특히 불염포로 불리는 타원형 이파리가 대개는 짙은 자갈색이지만, 경우에 따라 녹색에서부터 미색, 또는 짙은 홍색, 선홍색, 심지어 연분홍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 그야말로 색색의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리고 불염포 중앙에 자리 잡은 도깨비방망이가 육수꽃차례란 꽃 덩어리인데,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 조각조각이 4장의 꽃잎과 4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갖춘 각각의 꽃입니다. 영어 이름 중 ‘스컹크’에서 알 수 있듯 꽃에서 고기 썩는 듯, 그리 유쾌하지 않은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로 곤충이나 육식성 동물들을 불러 모아 꽃가루받이에 활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정된 개개의 꽃들이 달린 육수꽃차례는 통째로 땅에 묻혀 어린아이 주먹만 하게 커지면서 이듬해 꽃이 필 때까지 열매를 숙성시키게 됩니다.

산림청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는 강원도 이북의 높은 지대에서 자란다고만 돼 있는데, 설악산과 대관령, 점봉산, 오대산, 태백산 등 강원지역뿐 아니라 최근 울산, 경남, 전북 등 중부 이남의 숲에서도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설악산 꼭대기에서는 이른 봄 곰이 눈을 헤치고 어린잎을 먹는다고 해서 곰치라고도 불립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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