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규의 하좀하]

[오피니언타임스=한성규] 어제였다. 백수가 되기 전까지는 은행 통장 하나 만들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사실 은행에 들어설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경비복을 입고 곤봉까지 찬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보더니 '띠껍다'는 듯이 물었다.

“뭐 하러 왔슈?”

뭐 하러 오긴 뭐 하러 와, 은행업무 보러 왔지, 라고 생각하며 “통장 하나 만들려고요.” 라고 대답했다. 그 경비 아주머니 나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반바지에 티셔츠를 걸치고 슬리퍼까지 장착한 나는 누가 봐도 할 일없이 돌아다니는 백수였다.

“요새 통장 만들기 까다로운데.” 라며 그 아주머니 종이 한 장을 툭하고 던져준다.

무슨 통장 하나 만드는데 어렵기는 무슨, 이러면서 일단 은행구석에 있는 정수기에 가서 믹스커피부터 하나 타 먹으려고 하는데 그 경비아주머니 괜히 내 옆에 와서 쓰레기를 치우는 척 하며 저리 좀 비키란다. 은행까지 장거리를 걸어와서 당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는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경비아주머니는 곤봉을 까딱까딱 거리며 커피를 마시는 내 주위를 맴돌았다.

ⓒ플리커

띵똥, 내 차례는 2번이었다. 출근을 안 해도 되는 백수라 9시 땡 하자마자 은행에 간 참이었다. 새벽부터 온 것 같은 어떤 할머니에게 아쉽게도 1등자리는 뺏기고 말았다. 은행원은 2번 고객님, 2번 고객님! 그 5초를 못 기다리고 나를 불러댄다. 앗 뜨거, 뜨거운 커피 잔에 손을 대어가며 부랴부랴 고객창구로 달려간다.

“고객님 무슨 업무 때문에 오셨죠?” 라며 이 은행원도 나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통장하나 만들려고요.” 하면서 미리 작성해 둔 통장 개설 양식을 건네줬다.

안된단다. 무슨 목적이 있어야 한단다. 목적이 있다고, 돈을 넣어두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현금 보관하면 누가 훔쳐갈까봐 통장 만들어서 넣어 놓으려는데 더 무슨 목적이 필요하냐니까 재직증명서 같은 증명서류가 있어야 한단다. 납득이 안 된다고 하자 이 은행원, 테러리스트 자금지원방지법이니 뭐니 하는 더 납득할 수 없는 거창한 이유를 대기 시작했다. 이쯤대면 좀 쪽팔려도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 백순데요. 그랬더니 돌아가란다. 요즘 대포통장을 만들어서 범죄에 악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부차원에서 규정이 바뀌었다고 좀 더 쉬운 단어까지 쓰면서 설명해주었다. 직장인이면 대포통장을 안 만들고 백수면 만든다는 건가?

아니, 본인이 주민등록증 까고, 직접 찾아와서 통장을 만들겠다는데 무슨 대포통장이고 통장 하나 만들어서 어떻게 범죄에 악용을 할 수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서 포기하지 않고 좀 따졌더니, 정 통장 만들고 싶으면 계모임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총무를 맡아서 회칙이라도 한통 떼어 오란다.

계모임 통장을 사적으로 쓰는 거야말로 대포통장이 아니냐고, 백수는 은행통장도 못 만드냐고 화를 냈더니 옆 사람들이 일제히 내 반바지와 슬리퍼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 곤봉 찬 경비아주머니는 어느새 내 옆에 와 서 있었다. 도망갈 수밖에.

ⓒ픽사베이

요즘 정부에서 일자리 만들기 상황판까지 만들어서 청년 일자리 만들기에 올인하고 있다고 한다. 일자리가 있으면 무조건 행복해질까? 사실 은행 말고도 백수가 되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닌데, 내가 가진 직장에 딱히 불만이 있어서 그만둔 건 아니었다. 출퇴근 시간 자유롭고, 내가 알아서 일 분배하고 매일 거의 서너시면 퇴근해서 집에 있었다. 그리고 안정된, 아주 안정된 직장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를 자르려고 우리 팀장, 2년여를 노력했지만 결국 자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리 행복하지가 않았다. 내 경우에는 주5일 아침에 나가서 오후에 들어오는 남과 같은 생활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리고 너무 안정적이다 보니 변화가 없고 변화가 없으니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공무원이라 쉽게 잘리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치고 올라가거나 급격히 변할 수 있는 긴장 같은 것도 없었다.

대학교시절 나랑 친했던 사람들은 남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직장에 많이 들어갔다. 대기업, 공기업, 언론사 뭐 이런 곳에 다 들어갔는데, 하는 일은 다 달라도 공통점이 세 가지 있다. 회사가기 싫어한다는 것.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하면 욕부터 한다는 것. 그래도 꾸역꾸역 오늘도 회사에 간다는 것.

백수가 되면서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졌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좋은 자리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새로이 만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대학교 친구들처럼 금전적이나 사회적으로 남들이 인정하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해서 말할 때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열정을 가지고 말한다.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무조건 실업률을 낮춰야한다는 식인데, 조금은 다르게 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일자리에 청년들을 그냥 밀어 넣는 식으로 일자리 대책이 마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중소기업에 가기 싫어하니까 중소기업에만 가면 세금을 깎아 주고 통장에 돈을 넣어주고 얼씨구 이제, 직장에 가는 차비까지 준단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곳에서 일하기 싫은데 돈 때문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다. 일자리 미스매칭의 핵심 문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있다. 정의심이 강하고 사람 만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수학이나 영어를 못해 좋은 대학교를 못들어가 기자가 되지 못하는 사회. 자연이 좋고 농사짓고 싶은데 학교에서 칭찬받는 일에 중독되어 공부를 열심히 한 나머지 사방이 막힌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대기업 회사원.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가 정말 문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냐고? 이렇게 정책 비판만 할 거면 네가 한번 해보라고? 이런 건 정책입안을 하는 5급 이상 공무원들이 바뀌어야 한다. 나 같이 아이디어는 넘치지만 2년은 앉아만 있어야 하는 고시준비 하기 싫은 사람들을 5급 이상 레벨로 임용시켜 줘봐라. 아이디어 막 낼거다. 내가 일했던 외국 정부는 정책입안 급 레벨의 공무원을 다양한 출신 배경의 인재들로 채웠다. 애널리스트와 디자이너로 나뉘었는데 가장 중요한 스펙이 창의성이었다. 한국처럼 엉덩이에 땀흘려가며 외운 내용을 주어진 시간 안에 누가 누가 많이 쓰나 식의 논문쓰기 대결로 뽑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창의성이다. 당신이 5급 이상 공무원이라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정책을 생각 해내야 한다. 그게 당신들 일이다. 그냥 작년 사례, 외국사례 베껴서 다시 당신들 주특기인 논문 베껴쓰기하라고 높은 직급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

일자리 미스매치가 문제라고 한다. 중소기업은 인재를 원하는데 인재들은 공무원과 대기업만 바라볼 뿐 중소기업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라고 한다. 이대로라면 중소기업 사무직은 아무도 없고, 생산직은 외국인 노동자로 다 채워질 거라고 걱정을 한다. 내가 볼 때 진짜 문제는 자기가 하는 일을 영혼 없이 하는 5급 이상 공무원들, 하루에 몇 잔씩 커피를 마시며 책상에 앉기조차 싫어하는 대기업 직원들, 자기가 가진 능력과 상관없이 기계 돌리는 일만 해야 하는 근로자들이다.

예로부터 인사는 만사다, 라는 말이 있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면 어떤 조직이든 저절로 돌아간다. 모두가 마지못해 직장에 가는 나라, 국사 연도 맞추기 문제를 못 외워서 공무원을 못하는 나라, 일하는데 전혀 필요 없는 영어나 수학성적 같은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곳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라. 이런 나라를 개조하는 것이 일자리 대책의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성규

현 뉴질랜드 국세청 Community Compliance Officer 휴직 후 세계여행 중. 전 뉴질랜드 국세청 Training Analyst 근무. 2012년 대한민국 디지털 작가상 수상 후 작가가 된 줄 착각했으나 작가로서의 수입이 없어 어리둥절하고 있음. 글 쓰는 삶을 위해서 계속 노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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