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 피지의 수바(Suva)에서 열리는 DPI 리더십 트레이닝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 후에도 태평양에 떠 있는 몇몇 섬나라를 가 볼 기회가 있었지만 처음이었던 그 때의 감흥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창조주의 절묘한 솜씨로 색칠해 놓은 듯한 그곳의 경치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열심히 카메라와 캠코더를 눌러댔다. 그러나 곧 그 현란한 풍경을 조그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남기려는 일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촬영을 포기하고 눈부신 남태평양의 아름다움을 그냥 즐기기로 했다.

덕분에 비디오 카메라에는 변변한 사진이 한장도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서럽게 푸르른 바다, 새벽 안개를 뚫고 바다로 나가던 고기잡이배들, 마을 빈터에 모여 춤과 노래를 즐기는 원주민들의 모습이 어떤 사진보다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픽사베이

그 후 나는 어떤 여행을 가더라도 ‘증명사진’ 몇 장만 찍고는 그저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곤 한다. 나중에 그 지방을 소개하는 책을 한권 사면 그 안에는 내가 찍은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진들이 가득 실려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지금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을 될 수 있는 대로 가슴에 많이 담아두려고 한다.

우리는 특별한 순간들을 기록하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어댄다. 하지만 처음으로 걸음을 떼는 아이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아이가 내미는 손을 뿌리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고, 좋은 경치를 보고 열심히 눌러댄 카메라의 필름이 제대로 감겨 있지 않아 단 한 장의 사진도 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사진을 찍는 데 정신이 팔려 첫 걸음마를 하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기쁨을 놓치거나, 작고 네모난 렌즈를 통해서 들여다 본 것 이외에는 더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빽빽하게 적어 놓은 여행 계획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대신 저녁을 먹으면서도 줄곧 내일의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몇 시까지는 다음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 여행이 그저 목표를 달성하는 경주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내일 일을 생각하느라고 정작 현재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살며 사랑하며’의 저자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저녁 식구들은 잔칫날처럼 푸짐하게 차려 놓은 저녁 식탁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도대체 무슨 짓이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할 때에 당신 정신 나갔소?”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용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즐거움이 필요할 때는 내일이 아니라 지금이에요.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행복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요?” 비록 고등교육은 받은 일이 없지만 슬기로웠던 어머니 덕분에 그들 가족은 힘든 세월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오늘의 상황이 아니라 어제에 대한 후회와 내일 일어날지 모르는 사태에 대한 두려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일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지나치게 매달려 현재의 삶을 놓치고 있다.

Ⓒ픽사베이

통계에 의하면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으며,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그리고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문제에 관한 것이며, 단지 걱정의 4%만이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한시도 조용하지 않은, 부산스러운 이때에 미래에 대한 염려도 과거에 대한 회한도 다 접어두고 그저 오늘을 충실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핵전쟁이 일어나고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일개 소시민인 나로서는 그저 마실 물이나 조금 더 준비해 놓은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고, “올해도 허송세월을 하고 말았다”고 후회한들 그거야말로 어떻게 손써볼 길이 없는,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이다.

처칠은 “승자는 샴페인을 마실 자격이 있고, 패자는 샴페인을 마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우리들은 모두 샴페인을 마실 자격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또 다른 오늘을 위하여 다같이 건배합시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