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조선왕조실록> 속 백두산정계비와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지난번 칼럼인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북한이 팔아먹은 것인가?”를 보고, 어떤 분들은 백두산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며 반색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중국 측의 입장을 대변한다며 내게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또한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것은 중국 측의 시각으로, 토문강과 두만강은 다르다며 내게 강의 아닌 강의를 했는데, 분명 <백두산정계비>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송화강으로 흘러가고, 두만강과 서로 다른 물줄기인 것은 맞다.

앞서 밝힌 것처럼 목극등은 토문강, 즉 자신들의 두만강이라 생각한 물줄기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는데, 알고 보니 이 물줄기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가며 훗날 간도 영유권과 관련한 논란이 벌어졌다. 이는 토문강의 해석에 있어 조선과 청나라의 인식이 달랐던 것에서 기인하는데,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계비를 세울 당시 조선이 토문강을 송화강으로 인식했는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은 실록 속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의 내용을 중점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국경 인식

우선 토문강의 해석에 있어 두만강이라는 주장은 분명 중국 측의 인식이 맞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는데, 당시의 기록을 보면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위해 조선 측 대표인 접반사 박권이 조정에 봉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38년(1712) 5월 23일 기사 중

위의 기록에서 총관은 목극등을 말하는데, 내용을 보면 목극등이 토문강을 두문강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현 위치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것은 청 황제의 뜻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조선 측 관리에게 비석에 이름을 새길 것을 강압했다. 그럼 당시 조선은 어떻게 국경을 인식했을까? 만약 이때 조선이 토문강을 송화강으로 인식했다면 간도는 명백히 우리 땅인 것이 맞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숙종 대에 국경 인식은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두산 천지, 목극등과 박권의 대화를 통해 압록강과 백두산의 남쪽,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총관이 ‘그대가 능히 두 나라의 경계를 밝게 아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비록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장백산 산마루에 큰 못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되니, 큰 못의 남쪽이 곧 우리나라의 경계이며, 지난해에 황제(皇帝)께서 불러 물으셨을 때에도 또한 이것으로 우러러 답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38년(1712) 5월 5일 기사 중

위의 기록을 보면 목극등은 조선 측 관리에게 두 나라의 경계에 대해 아느냐?고 묻고 있다. 이에 조선 측 관리는 백두산 천지의 서쪽으로 압록강이 있고, 동쪽으로 두만강이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즉 당시 조선은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국경선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어 큰못, 즉 백두산 천지의 남쪽이 조선의 경계라는 이야기도 했는데, 이는 현 백두산의 동남쪽인 북한 쪽과 일치한다. 따라서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때만 해도 조선의 국경 인식은 분명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이었음을 알 수 있고, 목극등이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이야기할 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을 보면 조선 측 역시 두만강을 경계로 삼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최초 국경 인식과 달리 “토문강=송화강”이 된 이유는?

그런데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위치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최초 목극등이 토문강, 즉 두만강의 발원지라 생각하고 비석을 세운 곳이 알고 보니 이 물줄기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숙종’과 형조판서 ‘박권’, ‘이유’ 등이 이와 관련한 대화를 하는데, 이때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延袤)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38년(1712) 5월 5일 기사 중

당시 조선 조정은 목극등이 정한 수원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에 정정하고자 푯말을 옮겨 세웠다. 하지만 박권이 청나라가 훗날 푯말을 멋대로 옮긴 것을 질책하면 어쩌냐?며 외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다. 또한 송화강의 물줄기가 다시 두만강으로 갈 수도 있으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만약 이 물줄기가 두만강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 때가서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조정이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움직였는지는 ‘이유’의 대답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혹여나 이 같은 사실이 목극등을 비롯한 청나라 관리들이 견책을 받는 것에 대한 우려로, 훗날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두산정계비의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이제까지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당시 조선의 국경 인식은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인 것을 알 수 있고, 청나라 역시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고종 때에 이르면 기존의 국경 인식이 아닌 토문강을 송화강이라 주장하며,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뜬금없이 간도 영유권을 주장했을까? 우선 이때의 간도라고 하는 지역이 명확하게 밝혀진바 없지만, 대략 송화강과 두만강 안쪽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청나라에서도 자신들의 발상지로 여겨 봉금지대로 설정,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해동지도 속 백두산과 두만강의 모습, 정계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1712년 이후의 상황이 반영된 지도로, 정계비에 아래 세운 목책이 두만강까지 이어져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하지만 국제질서 속에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아무도 살지 않던 간도로 조선인들이 넘어가 정착하게 된다. 이는 1903년 북간도의 관리로 파견된 이범윤이 올린 장계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장계에서는 간도를 비어있는 땅으로 인식했다. 이에 청나라가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에 대해 자신들의 국적으로 편입시키려는 조치를 취하자, 조선이 반발하면서 “토문강=송화강”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당시 고종은 이중하로 하여금 토문강의 경계를 살펴보도록 했는데, 이에 이중하는 “옛 경계의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도 썩어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토문강’의 해석을 두고, 이른바 간도 지역을 두고 분쟁이 발발하자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 확정을 위해 두 차례의 감계회담을 열게 되는데, 바로 ‘을유감계회담(1885)’과 ‘정해감계회담(1887)’이다.

이때 토문감계사로 나선 이중하는 최초 토문강을 송화강으로 주장하며 간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힘의 역부족으로 결국 이중하는 송화강이 아닌 두만강의 최상류인 ‘홍토수(紅土水)’안으로 수정 제안을 했지만, 여전히 청나라는 홍토수 보다 낮은 ‘홍단수(紅端水)’로 국경을 정하라며 압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압박에 대해 이중하는 “내 머리를 자를지언정, 나라의 영토는 한 치도 줄일 수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후 청나라에서 ‘홍토수’와 ‘홍단수’ 사이의 ‘석을수(石乙水)’로 수정 제안, 타협을 시도했지만 이중하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두 차례의 감계회담이 결렬되면서, 고종은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파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1905년에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제로 넘어가게 되고, 1909년 청나라와 일제 사이에 간도협약이 체결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김희태

이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고, 이는 일제와 청나라 사이의 이른바 ‘간도협약(1909)’으로 귀결된다. 당시 일제는 남만주철도 부설권 등의 이권을 챙기고, 문제가 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줬는데, 이 협약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석을수’로 확정, 조선의 국경은 백두산에서 더 멀어졌다. 그러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간도협약은 무효화되고, 1962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조중변계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북한은 백두산 천지의 절반과 이중하가 수정 제안했던 ‘홍토수’를 국경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볼 때 <조중변계조약>은 북한 측이 선방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숙종 때의 국경 인식이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이라는 사실이 명백한데, 이는 <해동지도>를 비롯해 <대동여지도> 등 많은 지도에서 간도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과 <해동지도>에서 목책이 정계비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져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 백두산 지역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실록을 보면 영조 때인 1745년 함경도 심리사 ‘윤용(尹容)’이 영조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윤용은 영조에게 “토문강(土門江)에 목극등(穆克登)의 비(碑)가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니, 모두 공활(空闊) 하여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잃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고종 이전까지 현 백두산 일대는 쓸모없는 땅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어, 굳이 영토화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분명 백두산이 한민족의 발상지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상징성이 굳이 영토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후 사정을 보건대 당시 조선에 있어 백두산은 ‘계륵(鷄肋)’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도문 다리에서 바라본 두만강, 청나라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본 것은 사실이고, 조선의 국경 인식 역시 두만강이었다는 점은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희태

한편 앞선 기록을 통해 목극등이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본 것 역시 명확하다. 다만 정계비를 세울 때 목극등이 그 자신은 두만강의 발원지로 생각한 ‘토문강’이 실제로는 ‘송화강’이었다는 점에서 목극등의 치명적인 실수이자, 훗날 토문강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을 인지한 조선 조정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있냐며 쉬쉬했는데, 훗날 간도로 조선인들이 넘어가 정착하면서 문제가 되자 고종 때에 정계비 속 토문강을 송화강으로 해석, 간도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당시 조선의 국경 인식과 전후 사정을 알 수 있기에 숙종 대의 토문강을 송화강으로 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조선에 있어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인식된 지점은 고종 때로, 이 같은 내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백두산정계비>를 바라볼 때, 간도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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