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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측정에 관한 고찰[시언의 잡문집]
시언 | 승인 2018.10.02 11:18

[논객닷컴=시언] 고등학생 땐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다. 행복에의 집착은 명백한 불행을 반증한다. 집이 망한 것도, 성적주의 사회에서 전교 꼴등을 도맡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행복이 그토록 간절했던 걸 보면 고등학생 때의 나는 명백히 불행했던 모양이다. 책 속엔 답이 있겠거니 해서 남들 공부하는 야자 시간에 철학과 문학을 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그리스인 조르바』(카잔차키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황지우) 등이었다. 책 속엔 행복 대신 행복으로 가는 이정표만 난무했다. 신을 죽이고 인간으로 홀로 서라, 자유만이 전부다, 순도 100% 행복 같은 건 없음을 알면 덜 불행해진다 등등... 책에 답이 없으면 공부로 답을 찾아보자 결심하고 철학과를 갔다.

철학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철학스럽지 않았다. 2학년이 됨과 동시에 동기들은 소풍이 끝났다는 듯 살길을 찾아갔다. 동기 중 반절 가까이는 전과나 편입을 했고, 나머지 반절에서도 복수전공 하나 없는 건 몇 되지 않았다. ‘철학과’ 옆에 붙은 ‘경영학’(혹은 경제학) 한 단어가 취업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얼마나 높여줄 것인가를 아는 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데도 다들 그랬다. 내가 복수전공을 택하지 않은 ‘몇 되지 않는’ 그룹에 속해 있다고 해서 소풍을 끝낸 동기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취업의 문턱은 엄혹했고, 나의 소풍도 3학년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과연 김훈의 표현대로 밥벌이는 지엄한 것이었다. 행복을 찾아 온 철학과를 마친 지금까지도 나에게 누군가 행복을 물어오면 벙어리가 된다. 백가지 답이 동시에 떠오르기도, 어떤 답도 떠오르지 않기도 했다. 서른살 가까운 시간동안 행복에 대해 고뇌하면서 내게 남은 건 ‘어떨 때 조금은 덜 불행한가’에 대한 몇 가지 부분정답 뿐이다. 그 중 하나가 ‘측정됨’에 관한 고찰이다.

ⓒ픽사베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혹자는 ‘정치적 동물’이 맞다고도 한다)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다층적으로 교류하며 살아간다. 이때 대두되는 주효한 문제가 바로 ‘평가’의 문제다. 즉, 내 앞에 앉은 이 사람이 내게, 혹은 우리 조직에 보탬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수시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만큼 품이 많이 드는 일도 흔치 않다. ‘A는 000한 사람이다’로 정리될 만큼 인간은 단순하지 않은 까닭이다. 십수년을 내리 알던 친구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하고 놀랄 때가 얼마나 많았나. 그래서 도입된 것이 ‘측정가능한 평가 지표’다. 토익 점수, 공모전 순위, 출신 대학의 순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지원자 A가 ‘서연고’ 출신이고, B가 ‘서성한’ 출신이라면 전자가 후자보단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논리다. 부정확하고 충분치 않은 평가임이 틀림없으나 측정가능한 지표가 주는 효율성은 그 단점을 상회하고도 남는다. 얼마나 경제적인가. 누군가를 충분히 아는데 드는 무수한 시간을 숫자 가득한 이력서 한번 훑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 평가가 내가 나 스스로를 평가하는 잣대로도 쓰인다는 것이다. 누구는 토익점수 앞자리가 다르고, 누구의 출신 대학은 학벌 서열상 내 한참 위에 있으며, 동갑인 누구의 연봉은 내 1.X 배가 넘는 식이다. 측정가능한 지표를 활용한 비교는 언제나 빠르고 효율적이므로, 사회라는 먹이사슬 꼭대기에 선 몇몇을 제외한 절대 다수는 언제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불행해빠진다. 난 왜 이거밖에 안되지? 이런 무능력한 놈이라며 내가 내 자신을 헐뜯게 만든다. 취업을 하려면,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측정가능한 지표를 늘릴 수밖에 없으니 빠져나올 길도 없다.

이 생각이 뇌리에 박힌 후부터 나는 ‘측정불가능한 지표를 키우라’고 말하고 다녔다. 취업을 위해서, 혹은 고속승진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서’다. 시간과 공을 들여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음미했을 때, 내 안의 무엇인가가 변한다. 세상을 보는 시각일 수도, 가치가 있고 없음을 판별하는 가치관일 수도 있다. 분명히 무언가가 변하고 길러지지만, 그걸 측정해 수치화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치화되지 않았으므로 남과의 비교도 불가능하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은 사람과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은 사람이 어떤 자괴감도 없이 토론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너는 너로서, 나는 나로서 자족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기든, 꽃꽂이든 상관없다. 측정불가능한 무언가를 간직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을 조금 더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취업과 밥벌이는 엄혹하므로, 우리는 측정가능한 지표를 키우기 위해 번민해야 할 것이다. 퇴근 후 집이 아닌 토익 학원으로 발길을 돌려야 할 것이고, 무려 일러스트까지 할 줄 아는 동료를 따라잡기 위해 팔자에도 없던 일러스트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달리기를 하자. 사회생활에선 쓸모없는, 함부로 측정될 수 없는, 그러므로 온전한 나만의 것으로 남을 무언가를 하자. 조금은 덜 불행한 삶을 위해서 말이다.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논객닷컴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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