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왕수복(王壽福)이란 가수의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일찍이 1930년대 서울에는 평양기생 출신의 가수 하나가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통통하고 해맑은 얼굴에 다소 커다란 눈망울을 지녔던 그녀의 대표곡은 '고도(孤島)의 정한(情恨)'과 '인생의 봄' 두 곡이었답니다.

가수 왕수복은 1917년 평남 강동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성실이었지요. 그런데 할머니가 수명장수하고 다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수복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의 유년시절이 불우하듯 왕수복의 집안도 무척이나 가난하고 불우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생들이 그러하듯 수복은 11살 어린 나이에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으로 들어갔습니다.

기성(箕城)은 평양의 옛 이름이지요. 평양은 예로부터 부루나, 버들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곳이라고 유경(柳京), 혹은 서경(西京)으로도 불렸습니다.

이제부터 왕수복의 재주는 날개를 달고 둥실 떠오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가곡과 가사, 시조 등의 소리지도를 받았고, 거문고를 비롯한 각종 악기를 두루 배웠습니다. 드디어 왕수복이 열일곱 살 되던 해, 1933년은 서울로 가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는 벅찬 해였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갈고 닦은 서도소리 가락의 느낌이 살아나는 바탕에 유행가 가락을 얹어서 엮어가는 왕수복만의 독창적 창법을 구사했던 것입니다.

1933년 여름 왕수복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울지 말아요'와 '한탄' 등 2곡이 수록된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습니다. 이 음반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락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식민지백성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고, 이런 왕수복에게는 ‘최초의 민요조 가수’, ‘최초의 기생가수’ 등의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왕수복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전 조선에 울려 퍼지게 된 것은 1933년 가을,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옮긴 뒤 유행소곡이란 이름의 노래 '고도(孤島)의 정한(情恨)'(청해 작사, 전기현 작곡, 포리도루 19086)과 '인생의 봄'(주대명 작사, 박용수 작곡, 포리도루 19086)을 발표한 뒤였습니다.

칠석날 떠나던 배 소식 없더니
바닷가 저쪽에선 돌아오는 배
뱃사공 노래 소리 가까웁건만
한번 간 그 옛님은 소식없구나

어린 맘 머리 풀어 맹세하더니
시악씨 가슴 속에 맺히었건만
잔잔한 파도소리 님의 노랜가
잠들은 바다의 밤 쓸쓸도 하다

-'고도의 정한' 전문

유성기 음반 앞뒷면에 실린 이 노래는 당대 최고의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당시 포리도루레코드회사에서 왕수복이 취입한 음반을 선전하는 광고 문구를 함께 읽어보실까요?

평양의 명화(名花), 왕수복 입사 제1성, 신유행가의 호화, 금수강산 평양이 나흔 포리도루 전속 예술미성의 가희(歌姬) 왕수복 양의 독창 레코드 '고도의 정한'과 '인생의 봄'은 과연 정적한 가을에 우리를 얼마나 위로하여 줄까! 드르라 이 호평의 소리반을! 왕수복 취입집 반도(半島) 제1인기 화형(花形)가수!

이때 ‘화형가수’란 말은 가장 훌륭한 최고의 가수란 뜻입니다. 왕수복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대표적인 여성가수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무렵에 그녀가 발표한 대표곡들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여기에 옮겨 적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곡들 가운데서 왕수복의 목소리로 들어볼 수 있는 '그리운 강남'이란 노래는 우리의 귀에 아직도 여전히 익은 작품이지요.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하늘이 푸르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 부르니
이 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 가는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 발목 상한지 오래이라네

그리운 저 강남 건너가려면
제비떼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니 가면 간다네

-'그리운 강남' 전문

왕수복 명함 ⓒ이동순

당시 왕수복의 음반은 한 장에 1원 50전이었다고 합니다. 1935년, 당시 최고의 인기잡지였던 '삼천리'에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었는데, 총 여덟 차례나 실시했던 이 투표에서 왕수복은 1903표를 얻어서 단연 1위를 기록했습니다. 왕수복이 무대에 오르면 대중들의 함성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이렇듯 최고의 인기를 짐작하게 해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왕수복은 낮 시간 평양의 기성권번에서 귀빈들을 접대하는 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서울의 극장무대에 출연하는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통편이 좋지 않던 시절, 평양에서 서울까지 신속하게 당도할 수 있는 여건이라곤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왕수복을 위해 일본군 경비행기가 평양을 출발해서 서울 여의도비행장까지 냉큼 이동시켜주었다고 하니 과연 특급 대중연예인이 틀림없다고 하겠습니다.

어딜 가나 왕수복은 항상 화제의 중심인물이었고, 노래 또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왕수복의 대표곡 ‘어스름달밤’과 ‘인생의 봄’ 가사지 ⓒ이동순

‘만인 절찬’ ‘유행가의 여왕’이란 칭호와 함께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가수 왕수복의 삶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가슴 속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기생출신’이란 꼬리표가 짙은 그늘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왕수복은 그동안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궁리해오던 어떤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로 기생 신분의 소속을 평양권번에 반납하는 일이었고, 둘째로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서양음악을 제대로 수련하기 위해 일본유학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왕수복의 나이 23살, 그때까지도 서울의 레코드 회사들은 여전히 왕수복에게 끈질긴 취입 제의를 해왔지요. 그러나 왕수복은 1936년 그 모든 제의와 권유를 냉정하게 거절하고, 일본의 음악대학으로 유학생활을 떠나게 됩니다. 이탈리아성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그것을 조선의 음악적 전통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을까 항상 모색하고 고민했습니다.

메조소프라노 성악가로 다시 태어난 왕수복은 드디어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 도쿄에서 ‘무용 음악의 밤’ 공연이 열렸을 때 우리 겨레의 민요 '아리랑'을 서양식 창법으로 노래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요를 성악발성으로 부른 최초의 시도입니다. 1939년 왕수복은 한 일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최승희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요의 세계화를 위해 왕수복은 자신이 화형가수로서 누리던 모든 인기와 자기 앞의 보장된 길을 과감하게 버리고 매우 힘들며 고독한 경로를 선택한 것이지요.

이런 왕수복의 삶에서 그녀의 포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李孝石)입니다.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평양에 돌아와 언니가 운영하던 찻집에서 일을 돕고 있을 때 만나게 된 사람이 이효석입니다. 이효석은 당시 중증결핵으로 평양의 요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커피를 너무 좋아했던 이효석은 왕수복 언니가 운영하던 다방으로 가끔 차를 마시러 찾아오곤 했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왕수복과 인연이 닿게 된 것입니다. 평소 지식인 남성과 멋진 사랑을 나누고 싶은 갈망을 가졌던 왕수복은 이효석과 만나자마자 깊은 사랑으로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하지만 유부남 작가와 기생출신 가수의 사랑은 너무나 짧고 덧없는 봄눈과도 같았습니다. 1942년 두 사람의 사랑이 채 여물기도 전 이효석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임종하는 머리맡에서 왕수복은 깊은 슬픔으로 흐느껴 울었습니다.

다시 음악세계에 몰두하여 비통한 가슴을 달래려 했지만 당시는 이미 조선민요까지도 일본어로 부르라고 강요받던 일제말, 왕수복은 친일음악인이 되지 않으려고 단호하게 음악예술계와 작별합니다. 이런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수복의 단호하고도 엄정한 삶은 모든 희망의 빛이 꺼져버린 암흑기에서 특히 밤하늘의 별처럼 슬픈 아름다움으로 그 광채가 돋보입니다.

해방 되던 해에 왕수복의 나이는 스물아홉, 그녀의 앞길에 다시 새로운 연인이 나타났습니다. 평양 출신의 사회주의경제학자 김광진(金光鎭). 서울 보성전문 교수였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뒤 신문기자였던 시인 노천명과 약혼까지 한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김광진은 왕수복과의 사랑에 몸이 달아 노천명과의 결혼약속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노천명은 여기에 몹시 충격을 받아서 두 번 다시 결혼의 뜻을 갖지 않고 혼자 고독하게 자폐적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남녀 간 사랑의 인연에는 어떤 불가사의한 작용이 서려있는 듯합니다. 노천명은 ‘사슴’의 시인 백석을 너무 짝사랑해서 ‘사슴’이라는 대표시를 쓰기까지 했지만 전혀 백석의 반향을 얻지 못했습니다. 모더니스트 김기림이 노천명을 사모해서 그토록 구애의 편지를 보냈건만 노천명이 오히려 이를 거절했습니다. 뜻밖에도 김광진과 사랑에 빠져 애인으로 하여금 본처와 이혼까지 하도록 만들었지만 정작 그 애인은 기생출신 가수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홀연히 배신하고 떠나버립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허탈감과 남성에 대한 혐오, 생의 환멸이나 모멸감 따위가 노천명의 후반기 삶을 황폐함으로 가득 채웠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많은 화제를 뿌렸던 왕수복과 김광진 두 사람은 드디어 고향인 평양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분단 직후 김광진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며 김일성정권 초기의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공로로 김광진은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남편의 후광 속에서 왕수복은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화려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분단 이후 왕수복은 북한 음악계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펼칩니다. 일본유학시절부터 그토록 가슴에 담았던 꿈이요 벅찬 포부였던 조선민요의 현대화와 보급을 위해 마음껏 노력하며 제자양성에 힘을 기울입니다. 1955년 왕수복은 북한의 국립교향악단 성악가수로 활동을 펼쳐갑니다. 이러한 여러 공로가 쌓여서 1959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의 공훈배우칭호를 받게 됩니다.

원로음악인 왕수복의 활동을 김일성이 몹시 칭찬하며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회갑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김일성이 직접 회갑연까지 열어주었고, 김일성 사후 칠순을 맞이했을 때 아들 김정일이 또 잔치와 특별공연이 열리도록 배려했습니다. 왕수복은 팔순 무렵에도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무대와 올라 노래를 불렀다고 북한의 보도는 전하고 있습니다.

 

 

 

결혼과 관련해서 온갖 화제를 뿌리던 가수 왕수복의 노년은 이렇듯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꿈과 포부를 실현하며 매우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듯합니다. 1955년 가을, 왕수복을 비롯해서 최승희의 딸 안성희 등이 포함된 북한 공연예술단 일행이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알마티 오페라극장에서 고려인 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펼쳤다는 소식이 TV 화면에 오르기도 했었지요. 이 공연에서 왕수복은 특유의 맑고 고운 목소리로 민요 ‘아리랑’을 불러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합니다. 1965년 어느 날, 왕수복 김광진 부부는 뜻밖에도 판문점 휴전회담장 부근에 나타나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포착이 되기도 했습니다. 옛 친구 이난영의 소식을 묻고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몹시 슬퍼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오로지 가요 하나로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살리고 전통적 정서를 꽃피우려 무진 애를 썼던 가수 왕수복의 삶은 분단시대 북한에서도 여전히 그 빛이 퇴색하지 아니합니다.

2003년 6월, 왕수복은 86세로 세상을 떠났고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능에 묻혔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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