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큰 기대를 하고 간 공연은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간곡한 초대가 있었고, 공연을 하는 가수보다는 모처럼 친구를 본다는 설렘이 더 컸기 때문에 서울행 버스를 탄 참이었습니다.

여기서 아예 가수 이름을 밝히고 가야겠군요. 제가 그날 만난 사람은 이미배 씨입니다.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은 “아! 이미배…”하겠지만, 젊은 층은 대개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이미배 씨에게는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겁니다.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음악적 영역을 구축하고 확고한 팬 층을 거느린 가수였으니까요.

공연장에 가기 전 그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위키백과를 찾아봤더니 ‘1971년 TBC 주최 대학생 재즈 페스티벌에서 칸초네 <Ricorda>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1979년 1집 앨범 뱃사공을 발표했다. 1983년 2집 당신은 안개였나요, 두 번째 만난사람, 서글픈 사랑을 발표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동안 총 8장의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당신은 안개였나요> <서글픈 사랑> <눈이 내리네> <애가> 등 많은 히트곡이 있고요.

아무튼 그녀 특유의 창법, 매혹적인 목소리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부터도 친구가 이미배 씨 공연에 초청했을 때, “아! 그 안개 같은 목소리?”라며 제 나름대로 간직한 정보로 그녀를 추억했으니까요. 누구는 “지적인 목소리”라고 했고 누구는 “비가 내리는 날 술 한 잔 마시며 듣기에 가장 좋은 노래”라고 평가하기도 했지요.

가수 이미배가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호준

공연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가수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요. 제가 본 그날의 공연은 이미배 씨가 데뷔 40주년을 앞두고 16년 만에 소극장 무대에 서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공연장에 가면서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나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정보대로라면 1951년생, 우리 나이로 거의 70에 가까운 셈이지요. 물론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가수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도 많지만, 아무래도 전성기의 목소리를 기대하기는 어렵지요. 최근에 60대 초반의 남자가수 라이브 무대에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제 예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무대에 등장한 그녀에게서 ‘나이’를 읽는 거야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환한 미소는 세월의 무게를 훨씬 덜어줬습니다. 자신감이 충만한 미소였습니다. 게다가 연륜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으로 마음이 푸근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녀가 <Those were the days>로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면서 객석은 숙연해졌습니다. 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있었고 윤택했습니다. 전성기에 비해 호흡이 조금 짧아졌다는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시간의 폭력에 침탈당한 흔적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었겠지요.

세 번째 노래로 <당신은 안개였나요>를 부를 때쯤에는 객석이 온통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박수 치고 환호하고 어깨를 들먹이고, 심지어 손수건을 꺼내서 연신 눈가를 훔치는 관객도 있었습니다. 그날의 대부분 관객은 중년과 노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어보였습니다. 나이 지긋한 가수가 당당하게 노래하고, 똑같이 늙어가는 이들이 관객이 되어 함께 노래하고 환호할 수 있는 자리. 그동안 그런 광경은 상상도 못하고 살았거든요.

정말 이상한 일은 공연 중간쯤에 일어났습니다. <마리짜 강변의 추억>을 부를 때였던가? 아니면 <사랑의 말 빗물 되어>를 부를 때일지도 모릅니다.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감동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어느 순간 무대 위의 그녀가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에 남아있던 주름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새 생명이라도 얻은 듯 환하게 무대를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후광 같은 게 펼쳐지고 온 공간에 향기라도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요? 딱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객석의 감동이 고조되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그날 16곡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혼신을 다해 불러야 하는 노래들인데도 지친 기색 없이 무대를 마무리했습니다. 열정도 체력도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모처럼 만나는 감동적인 무대였습니다. 나이가 적지 않은 가수가 열정적으로 무대를 꾸미고, 그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눈치 볼 것 없이 소리 지르고 박수칠 수 있는 무대가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그 즈음 뇌리에 박힌 뉴스 하나가 공연장 위에 겹쳐져서 감동이 더욱 컸는지도 모릅니다. 우울증 환자가 계속 늘고 있는 가운데 70대 여성이 특히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발 뉴스였습니다. 여성은 여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남성보다 더 우울증에 잘 걸리는데, 이를 방치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노인층에서 우울증 증가율이 높은 이유는 경제력 상실, 신체기능 저하, 각종 내외과적 질환, 사별 등 생활사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또 독거노인의 증가와 가족 내 갈등,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늘어나는 사회 분위기도 영향을 준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었습니다. 노인 우울증 환자의 증가는 국가와 사회의 부담이기도 하지요.

그런 상황을 줄이려면 노인들이 상실감이나 고립에 빠지지 않도록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 이미배 씨의 공연이 주는 의미는 작지 않았습니다. 함께 노래하고 환호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다수의 노인들이 공유할 수 있다면, 단절감이나 소외감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공연 한두 번으로 우울증이 예방되고 치유될 리는 없지만, 그런 ‘발산 문화’가 계속 확산된다면 분명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노인은 시대에 버림받은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한 세대를 개척하고 이끌어온 주인공들입니다.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는 경구를 되새겨봐야 할 때입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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