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연의 하루 시선]

[오피니언타임스=정수연] 여행은 약 한 달치의 기억이지만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무리 지으려 한다. 약 한 달, 유럽에 홀로 여행을 다녀왔다. 시간에 쫓기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도망치고 싶어 무작정 떠났다. 그 어느 날엔 온종일 걸어 아픈 다리를 이끌고 트램 정류장에 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길가의 나무와 중세 유럽풍의 건물들, 그 위로 어슴푸레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그리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선. 이국적인 풍경에 멍하니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트램을 몇 번 보내고 나서야 숙소에 갈 마음이 들었는지 가방을 뒤적거리며 지갑을 찾았다. 순간 얼굴에 불안한 빛이 스쳤다. 지갑이 어디에도 없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저녁쯤 소매치기를 당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었다. 걸어가는 수밖에.

초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금방 상념에 빠졌다. 지갑을 언제 잃어버렸을까, 오늘 지갑을 꺼낸 적이 없는데 누가 훔쳐갔을까, 뭘 잃어버렸지, 카드는 정지시켜야 하나, 나는 왜 여행지에서 조금 더 조심하지 않고 소매치기를 당했을까, 하필 혼자 와서 도움 받을 친구도 없네, 아니 혼자 와서 오히려 다행인걸까, 숙소까진 1시간 남았는데 해지기 전에 들어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시간에 쫓겨 걷고 있었다.

ⓒ픽사베이

어느새 분홍빛의 하늘은 보랏빛이 되더니 어스름해지고, 달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해는 졌는데 숙소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았다는 생각에 주변 풍경은 신경도 안 쓰고 급하게 걷고 있었다. 잰 발걸음을 늦춘 것은 길가의 한 건물이었다. 5층으로 된 그 건물의 1층은 레스토랑이었다. 야외 테이블에 빨간 파라솔이 놓여있었지만 가게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럼에도 가게 주변이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것이 이상해 쳐다봤다. 그곳엔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손엔 맥주를, 다른 한 손엔 음식을 들고 있었다. 어떤 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게 문을 닫고 음식과 맥주를 내온 것 같았다.

저들을 보자 숙소를 향해 재촉하던 발걸음은 느려졌다. 유럽의 식당 앞에서 맥주와 간단한 음식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서양인들을 보자 내가 여행을 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자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 곳에 여행을 온 것이지 일상의 연장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간에 쫓기던 일상으로 돌아가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목적지로 급히 가려 했던 것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혼자 여행을 왔나.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 혼자 여행을 결심한 게 제일 큰 이유일 텐데, 여기에서도 시간에 얽매여야 하나. 아니다. 물론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간다면 더 좋겠지만 이미 해는 떨어졌다. 그렇다면 조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자 여유가 발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어느새 깜깜해진 밤하늘에도 걱정하지 않고 걷고 있었다. 길가엔 언젠가 외국 드라마에서 본 듯한 외국의 아파트가, 강아지와 딸과 부부가 저녁 산책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선에 느긋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조금 더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기분이 조금 더 좋고 조금 더 즐거웠다. 달은 이미 하늘 저 높이 걸려있고 다리는 더 이상 걷지 못할 만큼 아파왔지만 길가의 돌을, 나무를, 아파트를, 지나치는 사람을 보며 여유를 만끽했다. 소매치기 당하고 피곤하고 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니 모든 것이 괜찮았다. 밤거리가 낭만으로 가득 찼다.

당장이라도 잠들만큼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길가의 의자에 앉으면 보이는 가로수와 지나가는 자동차들. 그 위로 펼쳐지는 밤하늘 속 하얀 달과 별, 그리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선. 이 모든 것을 여유롭게 낭만적으로 보는 방법, 이것이 여행이었다. 

정수연

사람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이해하고 싶어 글을 씁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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