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규의 하좀하]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던 아이

나는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아이었다. 생각난다. 유치원 때였을 것이다. 운동회가 있었다. 100미터 달리기였는데, 당시 2년이나 빨리 유치원에 들어갔던 내가 다른 애들과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출발 후 3초도 지나지 않아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4명중에 4등이었다. 나는 부정출발을 문제 삼아 경기를 취소시켰다. 그렇게 출발만 세 번, 나는 내가 맨 뒤로 처질 때마다 바닥에 주저앉아 경기를 끊어버렸다. 나도 지치고 나머지 3명의 형아, 누나들도 지치고, 심판을 보던 선생님도 지치고 결국 내가 뛰는 경기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기지 못하면 아예 판을 엎어버리는,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 아이였다.

ⓒ픽사베이

두 존재의 죽음

그렇게 35년을 살았다. 지지 않는 아이로, 남들보다 빨리 달리는 청년으로, 남들에게 뒤쳐질까 두려워 앞으로 뛰기만 하는 어른으로 살았다. 남들이 잘 때, 남들이 먹을 때도,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숨이 차도, 혹시 이 길이 나에게 안 맞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어도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볼 여유 따위 없었다.

36년째로 접어드는 해였다. 내가 일하던 뉴질랜드 국세청 사무실에서 두 존재의 죽음을 겪었다. 한명은 내가 일하는 건물 16층에서 몸을 던졌고, 다른 한명은 내가 일하는 사무실 안에서 몇 십년동안 자기와 마주보고 있던 컴퓨터 화면 앞에서 조용히 허물어졌다. 한 명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데 자세한 사유는 모르고, 같은 팀의 동료였던 두 번째 존재는 뇌에 생긴 종양이 원인이라고 했다. 예고도 없고 경고도 없고 부고도 없었다. 그냥 갑작스럽게 두 존재가 내 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때였다.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평생 앞만 보고 질주할 줄만 알았던 내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게 된 것이 그때였다. 휴직을 했다. 여행을 떠났다. 사람들을 만났다. 전 세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처럼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처럼 앞으로 일, 받들어 돈, 을 부르짖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책을 보았다. 생각을 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가졌던 조바심, 열등감,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갈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노에서 멀리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남자의 평균수명은 대략 70세라고 한다. 내가 올해 37살이니 이제 반 정도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지금껏 35년은 남에게 지지 않고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려고 바동거렸다면 남은 35년은 나에게 지지 않고 나에게 맞는 기준을 스스로 정해서 살아가도 좋지 않을까. 

요즘 지는 법, 못하는 법, 남에게 무시당하고도 기분나빠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 줄을 설 때도 남보고 먼저가라고 살며시 비켜선다. 운전을 할 때도 항상 한번 양보하고 내 갈 길을 가고 있다. 자격증을 따거나 회사에 입사를 하기 위해서 속성으로 공부하지 않고 천천히 활자를 곱씹으면서 공부를 한다. 남이 하라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공부를 한다. 요즘 몸담고 있는 연극패의 중요한 배역에서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맡겨진 원숭이 캐릭터에 집중하고 있다.

연극이든 인생이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남들에게 지니까 마음이 편하다. 남들보다 조금 못하니 열등감도 사라져 매사에 초초해지지 않는다. 남들에게 조금 무시당하는 걸 당연시 하다 보니 분노도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하다

주위에서 경제가 어렵다, 경기가 안 좋다, 실업률이 사상 최고다, 난리다. 나는 직장도 없고 집도 없고 심지어 차도 없다. 직장 다니던 시절 모아둔 돈을 다 박아놓은 중국펀드는 –25%의 심장병을 유발할 정도의 수익률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잠도 잘 오고 소화도 잘 되지? 왜 이렇게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할까? [오피니언타임스=한성규] 

한성규

현 뉴질랜드 국세청 Community Compliance Officer 휴직 후 세계여행 중. 전 뉴질랜드 국세청 Training Analyst 근무. 2012년 대한민국 디지털 작가상 수상 후 작가가 된 줄 착각했으나 작가로서의 수입이 없어 어리둥절하고 있음. 글 쓰는 삶을 위해서 계속 노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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