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진의 지구촌뒤안길]

[오피니언타임스=유세진] 지난 2일 터키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피살된 재미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사건으로 국제사회가 시끄럽다. 인권 말살을 보여준 사우디의 초법적 살인은 많은 나라들의 분노를 샀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사우디를 제재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사우디는 계속 말을 바꾸며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어쩔 수 없이 카슈끄지가 살해됐음을 시인했다. 그래도 주먹다툼 끝에 실수로 사망한 것이라며 계획적 살해는 아니라고 부인한다.

카슈끄지는 사우디의 실질적 지도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강력 비난해 사우디 왕실에 미운 털이 박혀 있었다. 때문에 빈 살만 왕세자가 카슈끄지의 살인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의심과 함께 그에 대한 압력이 집중되고 있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우디가 사전 연습까지 마친 계획적 암살이라고 반박했다. 또 사우디 영사 관저에서 카슈끄지의 시신 일부가 발견됐다고 터키 언론은 전했다. 사우디측 해명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이렇다 할 대응을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도 사우디의 개입이 확실하게 드러나면 엄중한 처벌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은 한다. 그러나 실질적 행동은 뒤따르지 않는다. 그는 사건 진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우디측 해명을 믿는다고 말했다. 카슈끄지가 불한당 살인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수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또 무죄가 입증되기 전에 사우디가 유죄라고 추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1100억 달러(124조7400억원)의 사우디로의 막대한 무기 수출을 잃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우디에 면죄부를 주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된다.

사우디에 대한 트럼프의 이런 무성의하고 어정쩡한 대응은 '미국 최우선주의'(America First)로 대변되는 트럼프의 외교 정책에 도덕적으로 큰 구멍이 뚫렸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두었던 미 외교정책의 원칙에 현 트럼프 행정부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인권이나 자유와 같은 원칙을 뒷 순위로 밀어내며 경제적 이득이 제일 앞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은 오래 동안 세계 유일의 초강국으로서 세계 질서를 주도해 왔다. 이는 미국의 도덕성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신뢰가 바탕이 된 덕분이었다. 미국이 항상 올바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못을 저질렀다가도 곧바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미국을 믿었다. 이런 신뢰가 법에 의한 통치와 개방된 시장, 민주사회,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앞세우는 국제체계가 자리잡게 했다. 이를 바탕으로 냉전 시절 공산주의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G2 양강 구도가 이뤄졌다는 얘기도 있지만 여전히 미국의 세계 질서 주도에 대한 의존이 크다.

그러나 사우디에 대한 트럼프의 대응은 카슈끄지 살인이 정당한 처벌없이 얼버무려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부른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는 사라질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5월 취임 후 첫 해외순방 때 사우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 등에 대해 강연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미국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선언으로 비쳐졌을 수 있다. 비단 사우디뿐만도 아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카슈끄지 살해를 놓고 미국의 처리를 주목하고 있다. 사우디가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들도 사우디처럼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트럼프는 중동 지역에서 이란을 억제하기 위해, 또 이슬람국가(IS)의 테러를 막기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 등을 위해 사우디의 협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로 인해 빈 살만 왕세자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와의 관계를 끊는 대신,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선택이 실제 그런 것이라면 이는 분명 옳지 못한 선택이다. 원칙을 포기하면 단기적으로는 작은 이익을 얻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불이익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온두라스에서 출발해 미국으로 향하는 이주민 행렬에 대한 트럼프의 대응도 미국이 오래 동안 내세워온 인권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포기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이주민 행렬을 멈추도록 하는데 실패하면 온두라스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또 멕시코와의 국경을 폐쇄하고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미국 입국을 막겠다고 협박했다. 지난 4월 불법 이민자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강제 격리시켜 거센 비난을 받은데 이어 트럼프의 미국 최우선주의가 어떻게 인권에 대한 무시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방적인 미국 최우선주의가 항상 미국의 이익과 목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카슈끄지 살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미국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고 있으며 도덕적 우월성이 결여된 미국 최우선주의는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유세진

 뉴시스 국제뉴스 담당 전문위원

 전 세계일보 해외논단 객원편집위원    

 전 서울신문 독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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