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화의 요즘론]

출처를 알 수 없는 허기

혼자 살다 보면 갑자기 엄청난 허기가 몰려올 때가 있다. 급속도로 배가 고파지면 그때부터 패닉이 시작된다. 뭘 사다 먹기는 너무 싫다. 하지만 배는 고프다. 뭘 먹어야 할 지 모르겠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그럴 때 혼자서 치킨이라도 먹어볼 요량으로 치킨을 사다 먹기 시작하면 불현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배부른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배는 부른데 무언가 불만족스럽다. 차라리 아무 것도 먹지 않았을 때가 나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얼마 먹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꾸역꾸역 눈 앞에 놓인 닭을 한참 더 괴롭히다가 불현듯 멍해진다. 이것은 가짜 허기다. 나는 내게 속고 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어딘가 허전한 것은 당연히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허기는 흔히 말하는 마음의 양식으로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책은 허기가 없는 세상에서나 양식이 된다. 마음이 고플 때는 고향의 음식을 먹어야만 증상이 낫는다. 그럴 때는 얼른 알아차려야 한다. 집에 내려갈 때가 된 것이다.

ⓒ픽사베이

오랜만에 내려간 집. 할머니가 방바닥에 방치 해놓은 밥상에는 불규칙한 크기로 잘라놓은 두부가 떠 있는 된장찌개와, 어디서 얻어 왔는지도 모를 젓갈, 그리고 오래된 김이 놓여있다. 이미 오래 전에 간 맞추는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기 시작한 할머니는 그럼에도 기어코 된장찌개의 간은 맞추고야 만다.

미원이나 맛소금의 유무, 설탕이 얼마나 들었고 칼로리가 어떻고 하는 요즘 사람들의 요구는 할머니 요리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할머니의 식탁에는 영혼이 있고 풍성함이 있고 늘 지켜지는 원칙이 있다. 내가 엄청나게 큰 대접에 밥을 담아와서 걸신 들린 것처럼 밥을 떠 먹어도 할머니는 내게 ‘왜 이렇게 조금 먹냐’고 말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배가 부른 것 같다. 나는 본가에 내려 갔을 때 외려 밥을 조금 먹게 되는 것을 알게 됐다.

아무리 먹어도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특정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든 음식을 먹어야 낫는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만들어준 음식은 소중하고, 남다른 온도를 지닌다. 그런 음식을 매일 먹는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테지만 늘 허기에 시달리는 나 같은 사람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먹을 풍성함이 있다. 풍성함을 결정하는 것은 반찬의 가짓수가 아니라 마음의 유무다. 말하자면 내 허기는 내가 먹는 곡식 속 마음의 결여에서 온 것이다.

나를 위하여 밥을 지을 여유

일본에서 먼저 영화로 만들어지고 몇 년 뒤 한국에서 리메이크 된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서울 생활에 지쳐 있던 주인공이 시골로 내려가서 1년간 밥 지어 먹고 사는 내용이 나온다. 나 역시 다년 간의 자취 생활을 겪으며 시골에 내려가서 밥만 지어 먹고 살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하는 주인공의 동기를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저 흔한 힐링물이라 여길 지도 모르고, 재미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시대에 <리틀 포레스트>가 이 땅에서 리메이크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극 중의 혜원은 배고파서 시골로 내려왔다고 말하는데, 마음의 허기가 든 것을 치유할 길이 없어 제가 난 곳으로 되돌아가야 만 했던 것이다.

리틀포레스트 스틸컷 ⓒ네이버 영화

밥을 먹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는 즐길 만하고, 나름 재미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역시 몸과 마음의 여유에서 나온다. 몸이 힘들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상태에서 내가 나를 돌보기 위해, 나를 위해 밥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힘들 때는 자연스럽게 바깥 세상의 저렴하고 빠른 속도로 나오는 음식을 먹게 된다. 혼자 먹을 음식을 고르는 데는 가격도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택지는 좁아진다. 그렇게 자주 비슷한 음식을 섭취하다 보면 먹는다는 것이 마치 차에 주유를 하듯 귀찮고 지겨운 일처럼 느껴진다. 밥 먹는 게 재미가 없어지고 안 좋은 기억에 속하게 된다. 물론 무엇이라도 먹는 게 배 곯는 것보다야 낫고 그러니까 먹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실시간으로 피폐해 진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 가끔 요리를 한다. 그 요리는 누군가의 시선에서부터 자유롭고 나의 평가로부터도 자유롭다. 그저 내 취향에 맞추어 무언가 넣고 빼다 보면 정체불명의 음식이 만들어져 있고 내가 벌린 판을 내가 먹어 처리하면 그만이다. 속박될 것 하나 없이 자유로울 수 있기에 내가 나를 위해 만드는 요리는 귀하다. 어쩌면 혼자 밥 먹는 행위 자체가 너무 오랜 시간 지속되어서 생긴 슬픔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가끔 나를 위해 요리한다. 그 행위가 내 작은 숲을 가꿔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허승화

영화과 졸업 후 아직은 글과 영화에 접속되어 산다. 
서울 시민이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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