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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이민 행렬[김부복의 고구려POWER4]
김부복 | 승인 2018.10.31 07:00

[논객닷컴=김부복] 1860년대였다. 나라의 북부지방에서 홍수와 가뭄이 연거푸 발생했다. 그 바람에 주민들은 농사를 해마다 망칠 수밖에 없었다.

함경도 경성과 부령지방의 경우, 주민들이 1869년의 수해로 곡식을 한 톨도 건지지 못했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나중에는 그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굶어죽은 아사자(餓死者)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도 ‘탐관오리’는 설쳐대고 있었다.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지자 만주 땅으로 사람들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 지역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청나라 조정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령(封禁令)’을 내려 단속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도 이 일대의 변경을 봉쇄하고 있었다. 어기는 사람은 ‘월강죄(越江罪)’로 엄하게 다스렸다.

그렇다고 강 건너 기름진 땅을 바라만 보면서 굶어죽을 수는 없었다. 단속을 피해 넘어갔다. 농사를 지으면 먹고사는 문제가 그럭저럭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선 사람들은 수십, 수백 명씩 떼를 지어 월경했다. 이른바 ‘범월잠입(犯越潛入)’이었다.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 넘어간 것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19가구가 한꺼번에 강을 건너기도 했다. 인적(人跡)이 끊어지고 폐가(廢家)는 늘어나고 있었다.

몇 백 리나 되는 산길을 더듬듯 걷다가 굶주리거나 병들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도적을 만나 보잘것없는 등짐마저 털리는 일도 발생했다. 중간에 붙들려 송환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부는 감시를 피하려고 흑룡강(黑龍江) 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기도 했다.

만주 땅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밥’이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비참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쌀 한두 되에 자신의 아들딸을 파는 사람까지 있었다. 배고픔은 여전했다.

현지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남녀노소가 그칠 새 없이 오고 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걸식하고 있다. 아무리 밀어내도 동냥을 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 실정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기한(飢寒)에 시달리는 게 참으로 딱하다.…”

조선 말 ‘만주 이민사’는 이렇게 처량했다.

ⓒ픽사베이

고구려 때에는 ‘거꾸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의 한족과 선비족 사람 등이 살기 좋은 고구려 땅을 찾아서 ‘집단 이민’을 해온 것이다.

장수왕 24년(436), 북연(北燕)의 임금 풍홍(馮弘) 정권이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했다. 북위(北魏)의 침공으로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예 고구려에서 살겠다고 호소한 것이다. 그 이민자의 행렬이 ‘무려 80여 리’에 뻗쳤다고 했다.

장수왕은 군사를 파견, 그들을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했다. 이민자를 환영한 것이다. 북연 임금 풍홍을 평곽(平廓)이라는 곳에 잠시 거처하게 했다가 북풍(北豐)으로 옮기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영토가 광활했다. 만주 벌판만 해도 ‘일망무제(一望無際)’, 한눈에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살 길을 찾아 고구려에 몰려들었다. 고구려는 그럴 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국민 영토 주권’ 가운데 ‘인구’를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당시였다. 덕분에 고구려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었다.

북위 때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이오(李敖)라는 자는 평양성에 머무르는 동안 고구려의 경계와 인구 등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돌아가서 보고했다. 고구려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 사이에 3배나 늘었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인구는 수나라를 세운 문제(文帝)가 평원왕(平原王)에게 보낸 국서에서도 언급되고 있었다.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

중국으로서도 과다한 ‘인구 유출’이 골칫거리였다.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원왕(安原王) 11년(541)에는 고구려 땅으로 이주하려다가 붙잡힌 사람이 60만 가구, 300만 명에 달했다. 고구려로 무사히 들어온 사람도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양원왕(陽原王) 때에는 북제를 세운 문선제(文宣帝)가 고구려로 달아난 사람을 데려오겠다며 최유(崔柳)라는 자를 사신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송환 문제가 제대로 풀릴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양원왕을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고도 찾아간 사람은 고작 500가구, 2500명 정도였다고 했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고구려를 쳐들어왔을 때에는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이 망명해 오기도 했다. 병부시랑은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다. 그 고위 관료가 혼자서 고구려에 망명을 했을 까닭은 없다. 아마도 휘하 군사들을 제법 거느리고 망명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남아 있는 옛 수나라 사람의 ‘본토 송환’에 정책의 역점을 두기도 했다.

고구려는 적극적인 이민 포용정책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포용정책은 개간을 통한 식량 증산뿐 아니라, 두뇌 유치, 군사력 확충 등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민자에 대한 세금 우대정책도 있었던 듯했다. 서병국 박사는 저서 ‘고구려제국사’에서 ‘3년 1세(三年一稅)’ 원칙에 따라, 이민자들에게 3년에 한 번 세금을 거둔 것으로 보았다. 그래야 이민자들이 보다 쉽게 정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 이민자 행렬인 ‘캐러밴(caravan)’을 군대를 보내 막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지만, 고구려는 달랐다. 되레 군사들을 보내 호송한 것이다. 

김부복  news34567@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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