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Ainsliaea apiculata Sch.Bip. 

“아따, 찬바람 불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스산하기 짝이 없을 산골짝에 뭔 꽃이 핀다고 길을 나섭니까?”

십여 일 전인 지난 11월 초. 전국의 산과 계곡이 울긋불긋 물드는 시기 단풍 못지않게 화사하게 차려입은 행락객들과 달리, 이리저리 뒹굴어도 괜찮을 성싶은 작업복을 입고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아파트 승강기에 들어서자 이웃 주민이 아는 체를 합니다. 일전 시도 때도 없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길 나서는 모습을 궁금해하기에, “야생화 찾아다닌다”고 하자 그 후 만나면 으레 이런저런 꽃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이웃사촌의 말처럼 ‘뭔 꽃이 피겠느냐.’는 의구심이 드는 만추(晩秋)의 계절에 새로운 꽃이 피는 곳은 서울 인근은 아닙니다. 적어도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2시간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서부터 전남 장성의 백양산과 영광의 불갑산 등 남부지역, 그리고 멀게는 제주도 같은 해안지역까지 남으로 남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울긋불긋 물든 가을 숲에서 하얀 꽃을 피운 ‘작은 거인’ 좀딱취. 키도 몸집도 작고 왜소하지만 늦가을 숲의 주인인양 당당하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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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주민의 걱정 섞인 관심 속에 찾은 안면도의 야트막한 숲. 오전 10시가 지났지만, 아직은 사방이 어두컴컴합니다. 저 멀리 동쪽 바다부터 비추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서쪽 끝인 안면도의 숲속에 파고들기까지는 좀 더 긴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대개의 야생화가 그렇듯 좀딱취 또한 꽃이나 잎 등 몸집이 작기 때문에 찬찬히 살피지 않으면 선뜻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어서, 발걸음을 조심하며 숲을 살핍니다. 한데, 바닥엔 한때 알록달록 물들었다가 지금은 빼빼 말라 떨어진 낙엽만 가득할 뿐….

처음 사위를 분별하지 못했던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숲속의 작은 풀들과 열매, 그리고 꽃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키 큰 나무들에 매달린 많은 이파리에 가려졌던 햇살이 여기저기 바닥으로 파고들자, 좀딱취의 하얀 꽃송이가 어둠 속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합니다. 여기에 한 송이, 저기에 두 송이, 그리고 작은 골짜기 너머 이편저편 낮은 언덕에 제법 많은 개체의 좀딱취가 줄기마다 적게는 하나부터 많게는 대여섯 송이까지 꽃을 달고 섰습니다.

3개의 작은 꽃이 모여 하나처럼 보이는 좀딱취 꽃. 여러 개의 꽃이 모여 하나의 머리를 이루는 두상화(頭狀花)의 전형이다. 어떤 꽃에서는 연분홍 수술이, 또 다른 꽃에서는 머리가 둘로 갈라지는 흰색의 암술이 뾰족 튀어나온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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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도 녹색 잎을 유지하는 상록성 여러해살이풀인 좀딱취는 10월에서 11월까지 꽃을 피우지만, 추위에 약해 안면도 이남 따듯한 남부지방에서만 자생합니다. 키가 작게는 8cm에서 크면 30cm까지도 자라 아주 작은 편은 아니지만, 꽃과 줄기 등 전체 식물체의 크기가 왜소해 작다는 뜻의 ‘좀’ 자가 이름에 쓰인 듯합니다. ‘취’ 자가 든 것은 곰취, 참취 등과 마찬가지로 어린잎을 식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딱’ 자가 쓰인 이유는 잎이 딱지를 닮아서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치 않습니다.

2014년 가을 중국 황산에서 만난 좀딱취. 해발 1,864m인 황산의 ‘가을 야생화’라 일컬을 만큼 개체 수가 많았다. 위도가 북위 30도로 제주도보다 3도나 낮지만 고도가 높아 좀딱취가 자생하는 제주도와 식생이 흡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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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이름은 ‘작은’ 단풍취라는 뜻의 ‘Small maple-leaf ainsliaea’인데, 단풍취·가야단풍취와 함께 국내에 자생하는 단풍취속(屬) 3종의 하나가 바로 좀딱취라는 점에서 적절해 보입니다. 실제 흰색으로 피는 꽃 모양이 단풍취와 많이 닮았습니다. 다만 꽃 피는 시기가 단풍취는 여름이고, 전초나 꽃의 크기도 키다리와 난쟁이만큼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딱’ 자가 든 이유도, ‘딱취’란 식물도 존재를 알 수 없으니, 오히려 ‘좀단풍취’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원 줄기 밑에 딱지 형태로 빙 둘러 난 잎과 높이 30cm까지 곧게 뻗은 꽃대, 그리고 하나에서 최대 10여 개까지 흰색의 꽃이 달리는 좀딱취가 늦가을 늘씬하고 단정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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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부터 핀 개쑥부쟁이나 산국·감국 등 이른바 들국화가 늦게는 눈 내리는 초겨울까지 뒷동산을 지키겠지만, 제주도를 제외한 내륙에서 10월 이후 새로 피는 야생화는 바위솔 속(屬) 식물과 좀딱취 둘뿐(有二)일 것입니다. 그런 좀딱취가 야생화 동호인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른 봄 꽁꽁 언 땅에서 콩나물 줄기처럼 가냘픈 꽃대를 밀어 올려 손톱만큼 작은 꽃을 피우는 너도바람꽃이나 눈 속에 피는 복수초로부터 시작한 꽃 탐사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게 바로 좀딱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의 작고 못난 좀팽이들과 달리, 울긋불긋한 단풍을 뒷배 삼아 의연하고 당찬 모습으로 순백의 꽃을 피우는 좀딱취를 보며, ‘시작은 미미했지만 끝은 창대했다.’고 자족하며 ‘한해 꽃 농사’를 마감하는 것이지요.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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