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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후, 불행에 지지 않기를[고라니의 날아라 고라니]
고라니 | 승인 2018.11.14 11:44

[논객닷컴=고라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한 친구가 있다. 동시에 같은 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우리는 학교에서 놀다가, 밖에서 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각자의 집에서 스타크래프트에 접속하곤 했다. 약도 없다는 중2병에 걸렸을 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민망한 글들을 경쟁적으로 싸이월드에 올렸다. 공부가 급해진 뒤에는 집 앞 독서실에서 새벽에 함께 돌아왔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수험생)에 가까웠던 우린 「개념원리」 책의 예제, 연습문제, 심화문제를 풀며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괴성을 지르곤 했다. 곤히 주무시다 난데없이 들려온 소음에 밤잠을 설쳤을 이웃들에게는 새삼 죄송한 마음이다.

둘 다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사회학을 선택했고, 파일럿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친구는 항공운항과에 입학했다. 삶의 무대가 달라지며 예전만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우린 멀리서도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영화를 봤다. 한 사람의 연애가 끝나 쩔쩔맬 때면 다른 한 사람이 같이 있어줬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대부분의 사건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꽤나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픽사베이

작년 여름이 끝날 무렵, 친구의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친구의 장난기가 심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설마 싶었지만, 울먹이며 병원 주소를 불러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농담이 아님을 알았다. 병원에 가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오른쪽 두개골이 함몰돼 급히 뇌수술을 받은 친구는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칭칭 감아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았고, 그가 앉아 있던 조수석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고 한다.

친구는 두 달 만에 의식을 찾았다. 한동안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 얼굴을 알아보기까지 다시 두 달이 걸렸는데, 그 때까지 그는 욕만 했다. 대상은 없었다. 천장을 보며, 창밖을 보며, 때로는 눈을 감고 거친 말들을 토하듯 뱉어냈다. 의사는 뇌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나중에 친구는 본인이 그랬다는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온 세상이 무너져 그 밑에 깔려 있다가 눈을 떴는데, 나만 망가져서 병원에 누워 있고 세상은 그대로더라.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이 “x발 x같네.” 말고 뭐가 있었겠느냐고.

회복과정은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과정과 비슷했다. 친구는 걷는 법과 말하는 법을 다시 배웠다. 혼자 화장실에 가는 방법도 배웠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사고는 건강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선을 감지하는 능력도 앗아갔다. 사회성을 잃어버린 친구의 말과 행동으로 많은 이들이 멀어졌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상처받아야 했다.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친구는 그의 인생에 등장했던 많은 이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조각난 기억을 더듬더듬 맞추고, 타인이 기억하는 자신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조합해 정체성을 되찾아 나갔다.

살며 대면하는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보통은 사람이나 종교, 술과 같은 무언가에 의지하며 힘든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적당한 고난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불행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것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모습을 그저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친구는 종종 그 때 죽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말한다. 사고 당시 의식이 있었다면 구급차 승차를 거부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가 느끼는 절망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는 나로선 가만히 그 얘길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난 네가 살아줘서 기뻐”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다행히 친구는 행복의 역치가 낮다.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능력은 그의 주특기다. 요즘 그는 맛있는 걸 먹고, 좋아하는 공연을 보러 다니며 대체로 잘 지낸다. 얼마 전에는 다시 비행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장시간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혹시 다시는 비행을 못 한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면 그의 삶이 얼마나 크게 요동칠지 상상할 수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의 잘못이 아닌 불행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책임지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인데.

그가 늙고 병들 때까지 이 싸움에 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고라니

칼이나 총 말고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논객닷컴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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