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며칠 전 집수리를 한다고 하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조이를, ‘맡아서 보호해 주는 곳’에 맡기고 왔다.  조그만 방들 안에 몸집이 큰 개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올망졸망 앙증스러운 강아지들이었다.

우리 조이는 보기와는 달리 몹시 겁이 많다. 그 어미가 유기견이라 ‘풍찬노숙’도 하고 여기저기 숨어다니기도 하며 살아남았을 것이다. 험상스러운 사나운 개들과 굶주린 고양이들의 위협 앞에 어떻게 견디었을까?  긴장도 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조이는 두 살이 다 된 지금도 횡단보도에 서면 달리는 차들이 무서워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숨기에 바쁘다. 먹이도 달래가면서 먹여야 한다. 호텔(?)에 맡기기 전에 목욕시키고 발톱도 깎아주고 예방주사도 맞혔다. 자고 쉴 방석도 새로 마련하고 남은 먹이도 갖고 갔다.

“보호하는 분들 말 잘 들어야 한다. 밥 잘 먹고 친구들과 잘 사귀어야 한다. 한달 후 만날 때는 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며 두고 오면서 간절히 타일렀다. 짙은 어두움 속에 잠기는 작은 산들이 조이와 헤어지는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몇달 전에 아내와 사별한 친구가 있다. 둘이서 식사를 나눌 때면 아내 생각으로 눈물짓고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죽음은 인생의 완성일까?

그가 누구이든 사람은 이 죽음의 심연을 깊이 지니고 한 생애를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 모두를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 아닐까?

눈앞에 가물거리는 지평선,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메마른 땅위를 바람처럼 서둘러 실려 왔다.

비탈에 심겨진 나무도 굽으면 굽은 대로, 휘면 휘인 대로... 어떻게 공기와 바람과 흙과 이끼와 공존하며 살아올 수 있었을까?

개인의 욕망이 극대화된 21세기, 우리는 허구의 가상공간을 헤매는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들이다.

삶과 죽음, 가난과 부, 실패와 성공, 거룩함과 속됨, 빛과 어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부끄러운 지난날들이 내 영혼의 마른 기슭에 외초롭게 서성인다.

세상은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리라.

내가 떠나는 여정 앞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구현하고저 하는 삶의 목표를 향해 필요없는 부분을 쉼없이 덜어내고 싶다.

추수 감사절로 지키는 절기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라고 노래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구절을 묵상해 본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 존재의 실상 앞에 구원으로 다가서는 주님께 무릎을 꿇자.

“모든 것이 당신께 있나 이다”

소란스러운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교회는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묵상하는 곳이다.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곳도 아니요,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곳은 더더구나 아니다.

곤고한 시대를 살아가는 길 잃은 양떼들은 지금도 목자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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