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전송]

마중 나온 이가 웃는다. 세상의 예를 다 모은 듯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귀하다.
어여쁘다.
내 살인 듯 부드럽고 내 피인 듯 따뜻하다.
삼십 년 정붙인 듯 어느새 내 온 시간의 주인이 되어 새벽을 열고 대낮을 살게 하며 감사와 안도의 저녁을 맞게 한다.

©픽사베이

아들의 결혼으로 나는 한 생에 네 번째의 세상을 살고 있다.

첫 번째 세상은 부모님의 마중으로 “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았다. 단음절의 이름에 맞게 상큼하게 출발했다.

두 번째 세상은 남편의 마중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두 음절로 늘어난 이름에 가슴과 머리가 조금 깊어졌다.

세 번째 세상은 아들의 마중으로 “어머니”라는 이름을 머리에 쓰고 살았다. 세 음절의 이름은 세상에 대한 경외심과 신에 대한 의탁을 내게 선물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세상, 보는 사람 모두 신기하다 할 만큼 나를 꼭 빼닮은 며느리의 마중으로 “시어머니”라는 가장 긴 이름을 가지고 살고 있다. 첫 번째 세상이 준 이름보다 네 배나 불어난 이름을 나는 새벽 기도 때마다 무릎 꿇고 소리 내어 불러본다.

시어머니... 누군가의 시어머니라는 자리, ‘시’라는 관계보다는 ‘어머니’라는 의미가 더 큰 이름. 불러볼 때마다 어느새 ‘시’ 자는 멀어지고 ‘어머니’라는 글자만 마음을 꽉 채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지인들과의 대화 중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 얘들”이라는 복수의 지칭이 나온다. 자식이 하나밖에 없고 나 역시도 무남독녀라 어머니로부터도 들은 적 없었고 나도 해본 적 없는 “우리 얘들”이라는 지칭. 내 입에서 나온 그 말에 나는 내가 네 번째 세상에 무사히 안착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마중 나온 며느리를 뜨겁게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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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묻는다.
“시어머니 되니까 어떠세요?”

나는 대답한다.
“시어머니라는 이름까지 얻을 수 있어서 또 하나의 세상을 살게 됐으니 영광이지요.”

누군가 또 묻는다. 이 질문은 여러 사람한테 듣는다.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데 결혼시켜 내보내니 외롭진 않으세요?”

나는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같은 대답을 한다. 생각해보니 정말 토씨 하나 안 틀렸다.
“무지무지 외로운데 너무너무 감사해요.”

내가 답해 놓고도 너무도 정확한 표현이라 그때마다 머리가 쾌청해진다.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머리가 잡다한 망상에 어지러운 건 정확한 원인을 짚어내지 못했을 경우였다. 그런데 지금 외로움과 감사함의 두 가지 감정은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명쾌하고 그래서 기꺼이 안고 갈 수 있다.

삼십 년이 넘게 슬하에 두고 살아온 아들이 빠져나간 집안을 보면 외롭다. 그건 사실이다. 아들이 신혼여행을 떠난 뒤 며칠에 걸쳐 아들 방을 정리하면서 울기도 했다. 커튼을 빨아 걸고 침대 시트도 빨아 뽀송뽀송하게 다시 덮고, 한쪽 벽을 채우고도 모자랐던 책들이 나간 빈 책장들 먼지를 구석구석 닦아낸 뒤엔 해지도록 가만히 아들 방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 침대에 분홍색 커버를 씌운 베개를 아들 베개 옆에 하나 더 놓으면서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언제든 우리 얘들이 집에 오면 이 방에서 편하게 쉬게 해야지... 나는 나란히 놓은 두 베개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온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며 ‘감사합니다’를 소리 내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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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눈 뜨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 앞으로 나와 성호를 긋고 아들과 며느리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기도를 올렸다. 이 축복기도는 이미 지난 수년 간 해온 일이기도 하다. 아들이 학생이었을 때는 등굣길에, 취업을 하고 출근을 할 때부터는 출근하는 아들을 향해 늘 기도했었다. 물론 아들이 엄마의 그런 행위를 혹 불편해하고 또 때로는 민망해할까 봐 보는 데서는 못했다. 나 역시도 조금은 겸연쩍고 또 표시 내는 것 같아 면전에 대고는 할 자신이 서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관문이 닫히면 그때는 내 목소리의 들림에 상관없이 아들의 하루를 축복했다. 돌이켜보니 그것이 내가 어미로서 아들에게 해 준 최고의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 그 기도에 며느리의 이름을 함께 부른다. 먼 길을 걸어와 내 집 식구가 되고 내게 ‘시어머니’라는 네 번째 이름을 갖게 해 준 귀하디 귀한 사람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아들이 씌워준 월계관에 ‘시어머니’라는 꽃을 활짝 피워줘 맑게 빛나는 이마를 온 천하에 자랑할 수 있게 만들어준 내 며느리의 이름을 부르는 아침, 아들이 떠난 자리가 무지무지 외롭지만 아들과 더불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하나 더 생겨 너무너무 감사한 아침이 선물처럼 매일 들이닥치고 있다.

육십 해도 채 못 살았지만 나는 한 것도 없이 네 번의 세상을 보았고 네 개의 이름을 얻었다. 복도 이만저만한 복을 타고난 게 아니다.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과정이요 순서라고 말하는 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정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잘 살아온 사람이거나 행운으로만 도배한 얇은 습자지 속 세상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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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시어머니 혹은 장모가 되는 건 여자로서 일생에 세상을 네 번 사는 엄청난 축복이다. 이건 남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시아버지 혹은 장인이 된다는 게 신의 가호나 조상의 은덕 없이 때 되면 저절로 오는 명절 같은 게 아니란 걸 사람들은 알기 바란다.

기도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며느리와 함께 며느리의 친정 식구들을 위한 기도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돈댁이 평안해야 귀하디 귀한 내 며느리가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벌써 내가 살게 될 다섯 번째 세상을 기다린다. 이 생에서 내가 얻게 될 다섯 번째 이름을 기다린다. 다섯 번째 세상에서 나를 마중 나올 사람을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참으로 들뜨고 참으로 신비해서 어떻게 설명할 재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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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중으로 첫 번째 세상을 살았고, 남편의 마중으로 두 번째 세상을 살았으며, 아들의 마중으로 세 번째 세상을 살다가, 며느리의 마중으로 네 번째 세상을 살고 있는 축복을 누리고 있는 지금, 나는 있는 욕심 없는 욕심 다 내어 ‘손자’의 마중으로 다섯 번째 세상을 살다 가기를, 내 마지막 이름은 누구누구의 ‘할머니’이기를 소망한다.

이름은 그 사람이 살아온 세상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가 살았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나를 마중 나오고 내게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을 부르며, 그리고 도래할 다섯 번째 세상과 마중 나올 손자의 보송한 뺨을 그리며, 나는 오늘도 무지무지 외롭고 너무너무 감사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서석화

시인, 소설가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종이 슬리퍼> /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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