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늘의 하프타임 단상10]

[오피니언타임스=최하늘] 요즘 들어 젊어 보인다든가, 젊게 사는 것 같다는 말을 간간히 듣는다. 기분 좋으라고 해주는 소리인줄 뻔히 알면서도 마음에 위로를 얻는다. 인사치레라 하더라도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닐 터이니, 어딘가에 조그만 근거는 있을 것이다.

젊어 보인다는 것은 제 나이보다 덜 들어 보인다는 의미일 것이다. 흔히 나이가 한창 때인 것처럼 살거나 혈기 왕성하게 사는 사람을 보고 젊다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 눈에 내가 잠시라도 그렇게 비쳐졌다면 감사한 일이다. 가만히 그 이유를 가늠해본다. 이제 나는 가히 전투적이라 할 만했던 삶을 벗고 잠잠히 사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누군가의 눈에 오히려 젊어 보인다니 아이러니다.

ⓒ픽사베이

문득 수 년 전에 들은 독수리의 생애가 생각난다. 독수리는 70년 수명을 살아내기 위해 한 차례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생애 40년쯤 되면 그의 자랑이던 강한 날개와 날카로운 부리는 위용을 잃는다. 그대로 살면 머지않아 생이 끝난다. 결단이 요구된다.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간 독수리는 무서운 고통을 감내하며 휘어진 부리와 발톱을 스스로 뽑아낸다. 무거워진 깃털을 제거하는 아픔도 감수한다. 조롱과 외로움과 고통의 시간일 것이다. 그런 150일이 지나면 그는 새로워진 몸으로 다시 날아오른다.

우리네 인생살이 같아 가슴 먹먹했던 그 이야기를 이제 내가 살아낸다. 이전 것들을 뽑아낸 알몸위로 새로운 것들이 삐죽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젊어진 것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젠 더 높이, 더 빨리, 더 많이 날려 애쓰지 않는다. 조용히 날개를 펴고 바람에 몸을 맡길 뿐이다.

나의 하프타임. 그것은 힐링(healing)이고, 리프레쉬(refresh)다. 쉼이고 작전타임이다. 생의 바퀴를 갈아 끼우는 리타이어(retire)다. 지난날을 뽑아내고 새날을 노래한다. 뭉툭해진 부리와 발톱을 뽑아내니 새 꿈이 움튼다. 옛 마음이 밀려난 자리에 새 소망이 채워진다.

노래 하나, 지난날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2018년 3월. 부활의 날개 짓에 앞서 먼저 방향을 정한다. 내 앞에 선택지가 하나 놓인다. 전반전을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익숙한 것들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길 것인가.

막연한 기대감으로 ‘은빛 날개’라는 교회 프로그램에 수강 신청을 했다. 은퇴자들의 후반전을 돕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강사로 나온 목사님에게 선택을 위한 조언을 구해봤다. 그의 입에서 단 1초도 망설임 없이 답이 튀어 나온다. “벗어 놓은 양말을 다시 주워 신으실 거예요?”

그렇다.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려면 지난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 좋은 일이었건 나쁜 일이었건, 이전 것은 지나갔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43:18-19)

두 손을 놓는다. 천 길 낭떠러지일 줄 알았는데, 겨우 몇 자 깊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좋아하는 것을 잡을 것이란 소망이 생긴다. 새로 일어날 일, 새로 걷게 될 길에 대한 기대가 꿈틀거린다. 저 멀리에 작은 구름 한 조각이 나타났다. 머지않아 큰 비가 내릴 것이다.

노래 둘,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어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이란 사실을 경험하며 산다. 많은 일이 그랬다. 나의 반응에 따라 재앙이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했다. 그 반응의 시작점은 마음이다. 육체의 남은 때를 위해 또 하나의 노래를 부른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40:4)

이 하프타임에 내가 할 또 하나의 일은 내 마음의 밭을 갈아엎는 것이다. 높은 데를 깎아내고 파인 곳을 메운다. 그것은 긴 세월 내 안에 둥지를 틀고 나를 괴롭혀 온 교만과 열등감을 털어내는 작업이다.

교만과 열등감의 뿌리는 비교의식과 인정욕구일 터이다. 태어나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인정욕구와 비교의식. 이제 그것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어리석은 것들인지를 깨닫는다.

교만과 열등감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며 살아온 세월들이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내 인생을 갉아먹었던가. 그것들로 인해 얼마나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내 마음이 높아질 때면 어김없이 지옥문이 열렸다. 내가 높아지길 거부하고 낮은 곳으로 향할 때 천국문이 열리는 것을 본다.

노래 셋, 저 혼자 둥그러질 리는 없다

하프타임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다. 이제 그 터널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본다. 무엇보다 마음이 변했기에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내면이 변하니 언어가 바뀐다. 며칠 전 만나 얘기를 나누던 지인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 한 알/장석주)

그렇다. 저절로 붉어졌을 리 없다. 저 혼자 둥글어졌을 리도 없다. 그래서 내 삶에서 만난 모든 게 감사하다. 쉴 새 없이 내 삶에 불어 닥친 크고 작은 태풍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 수많은 천둥 번개가 감사하다.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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