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차마 합격을 기원한다는 말은 못하겠다. 내가 너의 합격을 기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기원은 부담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부담도 무거운 너에게 또 다른 부담을 얹어주고 싶지 않다. 나는 너의 주저앉음이 가엽다.

부담에 짓눌린 네 모습을 나는 1년 내내 봐왔다. 성적이 뜻대로 나오지 않는 막막함과 3월, 6월, 9월 평가원 모의고사마다의 비명 같은 심란함을 나는 바로 옆에서 들었다. 너의 비명은 소리가 나지 않아 자조에 가까웠지만, 나도 그 시절 질러보고 싶었던 것이어서 그것이 비명임을 나는 몸으로 안다. 소리로 내지르지 못한 기운은 네 안에서 가시처럼 뻗혀 만성 두통, 역류성 식도염, 위경련, 신경성 장염이 되었다. 너는 아마 아플 것이지만 괜찮다고, 괜찮아야 한다고 주문을 외우는 사이, 너는 네가 아픈지, 아파도 되는지, 아파야 하는지를 모르게 되었다.

그저 잘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서, 잘하지 못한 너는 사실 매일 괜찮지 않았다. 네가 무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잘함의 기준은 네 기대이고, 기대는 늘 현실보다 위에 있어 괜찮지 않음은 고3의 보편성이다. 너는 기대함으로써 현존하는 너를 부정하지만 기대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너는 네가 틀렸다는 원죄 속에서 꾸역꾸역 괜찮은 척했다.

‘초-중-고’의 문법 속에서 성적이라는 유일신이, 너의 12년을 너의 스무 살을 수식하는 긴 부사어로 만들었다. 너는 교리에 동의한 적 없이 귀의했다. 쉬는 시간에도 읊어대는 영단어는 순결한 고해성사였고, 학교와 학원으로의 궤적은 성실한 고행이었다. 밤마다 문제집을 성경처럼 보며, 인강을 복음처럼 들으며, 불면의 기도를 올렸다. 아직 진짜 삶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어서 너는 고행과 자해를 구분하지 못했다. 서술어에 도달하지 못한 군더더기의 시간들이야 다소 틀리더라도 제대로 된 ‘대학’이라는 서술어를 가질 수만 있다면 너는 옳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적은 신뢰하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해서 너는 늘 불안했다. 삶이라는 게 본래 불확실성의 연속이어서 너의 불안이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너의 12년은 정규교육과정이라는 확실성의 레일 위에서만 달려왔기 때문에 너는 이런 불확실성에 미숙할 뿐이다. 내일의 ‘내 일’이란 대학생이 되기 위한 공부뿐이었다. 네가 겪은 불확실성이라고 해봐야 소풍날 비가 올지, 야간 자율학습을 빠질 수 있을지 정도의 레일 안쪽의 짧은 희비가 고작이었다. 이런 너는 수시 원서를 쓸 때, 안절부절 못했다. 9월 모의 평가가 잘 나오면 수능 때도 그럴 수 있을지 불안했고, 9월 모의 평가가 못 나오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수능을 기약하지만 수능은 역시 미지수여서 우울했다. 그래서 평균적인 네 성적에 수시 원서를 맞추지만 너는 너를 믿지 못해 내게 자꾸 확인했다. 네가 내놓은 너의 답은 대체로 최선이어서 나는 그저 네 생각에 동의해줄 뿐이었다. 너는 내 동의를 듣고서야 네가 쓰려고 했던 원서를 썼다.

레일의 끝에 걸어둔 각자의 내일은 나름의 객관성에 근거한 것들이었다. 내신과 모의고사 결과와 작년의 입결을 비교해 너는 네가 ‘되어야 할 것’을 정했다. 그러나 실전의 긴장감과 반수생과 재수생이 빠져 있어 너는 틀린 것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 틀림을, 너는 목표, 기대, 희망이라 불렀다. 희망하면서도 불안하고, 불안하면서도 희망하는 착란 같은 시간을 한국에서는 고3이라고 불렀다.

오지 않을 것 같은 판결의 시간은 기어이 온다. 희망의 무게에 비례하는 희열이나 절망이 치고 지나가면 너는 비로소 삶의 민낯을 보게 될 것이다. 합격 혹은 불합격. 치열했던 12년을 생각하면 삶은 다소 허무할 만큼 무덤덤할 것이다. 너는 드디어 준비해온 진짜 네가 되거나 1년을 유예한다. 그리고 네 10대의 문장은 마침표를 찍는다.

마침표 앞의 합격/불합격을 너는 네 10대의 서술어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성적과 너는 12년 동안 동일시되었고 입시 결과에 의해 다음 문장의 내용이 바뀐다. 그러나 그것은 너의 일방적인 믿음일 뿐 사실이 아니다. 입시는 종교가 아니라 너의 100% 현실이다. 너는 성적으로 산술되는 존재가 아니다. 네가 12년 동안 진짜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너의 아프고, 막연하고, 불안했던 것들은 모두 진짜의 순간들이었다. 물론 당락으로 다음 문장의 내용이 바뀌긴 하겠지만 주어가 너임과 인생은 늘 서술어 중임은 변치 않는다. 너의 지난 날들은 대학을 수식하는 시간이 아니다. 너는 없어도 되는 부사어인 적이 없었다. 늘 네 문장의 주어는 너였고, 서술어는 ‘공부하다.’였다. 그래서 네 성적과 무관하게 너는 틀린 적이 없었다.

고생했다.

기원대신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입시의 시간들, 특히나 대한민국 고3의 문장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너의 지난 시간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이제 하나의 문장을 끝냈으므로 한 칸 띄우고 너는 새 문장을 시작하면 된다. 그뿐이다. 어떤 문장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스무 살짜리 ‘너’를 주어로 씩씩하게, 쓰자. 그것이 네가 너의 스무 살에 넘겨주어야 할 네 이름으로 된 문맥일 것이고, 너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김봉성

대충 살지만 글은 성실히 쓰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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