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주의 혜윰 행]

[오피니언타임스=최미주] 운동도 안하면서 힘들다고 징징대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친구 녀석 역기를 들고 집에 찾아왔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비실거릴 거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더군요. 서서 일하는 사람은 허리가 곧아야 한다며 데드리프트란 운동을 강제로 시킵니다. 어쩌겠습니까. 퇴근 후 한 시간 반을 차타고 온 성의를 생각해 낑낑거리며 몇 개 따라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녀석은 자세를 몇 번 잡아주더니 시골에 김장하러 간다고 쏜살같이 사라집니다.

그러고 보니 김장철이 다가왔습니다. 이맘때면 엄마는 혼자 바빴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들락거리며 배추 개수를 세고, 여기 저기 전화를 걸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면 단위 작은 마을에 살았던 터라 모든 이웃이 이모고 삼촌이었습니다. 주말엔 옆집 가족과 낚시 가거나,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기도 했지요. 부녀회장 출신 엄마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과 배추를 공동구매하고, 남해에 있는 친척집까지 가서 구해온 마늘과 젓갈을 이웃들에게 마구 나눠줍니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남산마을 주민들이 겨우내 먹을 김장 품앗이를 하고 있다. ⓒ거창군

문득 얼마 전 근육장애인협회 후원금 종이를 들고 찾아가 좋은 일 좀 함께 하자고 제안하니 그럴 여유가 없다고 단번에 거절하던 집안 어르신이 떠오릅니다. 그는 며칠 후 종친회에 상당한 금액을 후원해 친척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나누면 이름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젓갈 나누듯 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나눠준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엄마의 나눔에 감동해 일부러 집까지 찾아와 김장 비법을 전수해주는 이웃도 있습니다. 김장의 생명은 양념 비율이라며 자신이 직접 만든 계량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던 이웃의 모습을 보며 수업 준비를 알차게 잘하면서도 늘 모르겠다고 말하는 한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려주기 아까운 걸까요? 내심 괘씸한 마음까지 듭니다. 대충이라도 알려주면 후배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도 될 텐데, 왜 다른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할까요? 김장 비법을 전수하듯 서로 노하우를 공유하면 더욱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이웃 아주머니들의 손을 탄 다양한 빛깔의 김치가 식탁을 가득 채웁니다. 집에서 담근 김치보다 다른 집에서 받아 온 김치를 더 많이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식탁의 모습과 달리 초콜릿 한 알만 주면 안 되냐는 친구의 제안에 ‘내가 먹을 것도 없다’며 언짢아하던 제자 한 명이 떠오릅니다. 초콜릿의 달콤함을 혼자만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요? 내심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함께 먹으면 달콤함이 두 배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한 집은 김치에 굴을 넣고, 어떤 집은 조기를 넣고, 다른 집은 갈치를 넣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겠다며 다들 각각의 김치 담그는 법을 수긍합니다. 그러던 모습과 달리 특성화고등학교에 가 일찍 취직하고 싶다는 학생의 말에 그러면 잘못된 인생을 산다고 화를 내던 한 학부모가 생각납니다.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일까요? 내심 혼란스럽습니다. 집집마다 김장 방식을 수긍하듯 개개인의 삶도 다양성을 존중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우리도 친척들이 한데 모여 김치를 몇 백 포기씩 담그던 때가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턴 김장철인데도 이모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 이사를 간 것도 아니고 옆집에 사는 이웃이 바뀐 것도 아닌데 요즘 들어 김장철이 너무 조용합니다. 더러는 김치를 그냥 사 먹는 해도 있습니다. 다 같이 둘러 앉아 갓 삶은 수육 위에 새로 담근 김치를 손으로 스윽 찢어 올려 먹던 그 시간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요?

시골에 도착하자 친구는 빨간 양동이에 담긴 양념을 찍어 보이며 춥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것도 모자라 운동은 몇 개 했느냐, 역기까지 갖다 주는 친구가 어디 있느냐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래도 무관심보단 관심이 낫다고 적적한 시간을 채워주는 그 오지랖이 퍽 반갑습니다.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김장철에 어울리는 동료 한 명이 떠오릅니다.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일 년 동안 정리하고 모은 자료를 보내주고 사람들에게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듣던 그에게 잘 지내냐고 문자 한 통 보내봅니다.

세상이 늘 그때 그 시절 김장철처럼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래간만에 트레이닝복을 꺼내 입었습니다. 운동도 안하고 비실되고 있을 친구를 찾아가 오지랖을 부려볼까 하고. 김장철이니까요. 

최미주

일에 밀려난 너의 감정, 부끄러움에 가린 나의 감정, 평가가 두려운 우리들의 감정.

우리들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감정동산’을 꿈꾸며.

100가지 감정, 100가지 생각을 100가지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쪼꼬미 국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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