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8]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우리나라에도 원숭이가 있었을까. ‘과거사’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중국의 옛 기록이다.

“부여 사람들은 의복을 입을 때 흰색을 숭상한다.… 대인(大人)은 여우·살쾡이·원숭이·희거나 검은색의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른다. 이름난 말과 붉은 구슬, 담비와 원숭이 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나는데 구슬의 크기는 대추만 하다.”

알다시피, 부여는 고구려에 ‘흡수합병’된 나라다. 고구려와 합쳐졌다고 해서 부여의 원숭이가 갑자기 사라졌을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 1호분’에 원숭이가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원숭이가 재롱을 부리는 그림, 나무에서 떨어지는 그림 등이다.

ⓒ픽사베이

신라 때에도 원숭이가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얘기다.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자 하얀 피가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하늘이 컴컴해졌다. 땅이 진동하며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감천(甘泉)의 샘물이 말라 고기와 자라들이 다투어 뛰어올랐다. 나뭇가지가 부러지자 원숭이들이 떼 지어 울었다.”

부여 때는 원숭이 가죽을 ‘옷감’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이차돈이 순교하던 신라 때에는 원숭이가 ‘떼’를 지어 울었다고 했다. 원숭이는 아마도 흔한 짐승이었다.

고려 때에도 원숭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파한집’을 쓴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속세를 버리고 지리산의 청학동을 찾아 나섰다. 당시에는 ‘무신의 난’ 때문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칼끝을 피해 절에 몸을 숨긴 것이다. 이인로도 대나무 궤짝을 소의 등에 싣고 길을 떠나고 있었다.

이인로는 화엄사를 거쳐 신흥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가는 곳마다 선경이었다. 인간 사는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시 한 수를 바위에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지팡이 움켜쥐고 청학동을 찾으려 했지만(策杖欲尋靑鶴洞) 첩첩한 숲 속에서는 원숭이 울음소리뿐(隔林空聽白猿啼)….”

‘무신정권’에 아부한 ‘해바라기성’ 선비였다는 평가를 받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도 원숭이에 관한 글이 있다. 어느 날 이규보가 기(奇)씨 성을 가진 상서(尙書)의 집에 들렀더니, ‘성난 원숭이(怒猿)’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원숭이가 성을 낼 일이라도 있었던지(猿公有何嗔), 사람처럼 서서 나를 향해 짖고 있네(人立向我호).”

원숭이는 당시만 해도 ‘상서’ 정도의 벼슬아치 집에서 구경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동물이었던 듯한 글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시대 초기에도 원숭이가 있었던 듯싶었다. 세종대왕 16년(1434) 4월 11일, 임금이 전라도 감사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김인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원숭이 6마리를 잡아 길들이게 해서, 현재 목사 이붕에게 전해주고 왔는데… 기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풀이 무성한 섬이나 갯가에 풀어놓되… 잡아가지 못하게 하고 힘써 번식하도록 하라.”

세종대왕은 이렇게 원숭이를 ‘생포해서’, 새끼를 낳아 번식시키는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랬던 원숭이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연산군 8년(1502) 일본이 암컷 원숭이를 바치자 임금은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연산군 9년(1503)에는 일본 스님 의흥(義興)이 원숭이와 말을 바쳤는데, 말만 받고 원숭이는 돌려보내고 있었다. 원숭이는 어느 새 ‘남의 나라 짐승’이 된 것이다.

조선 중기쯤 들어서는 원숭이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기도 했다.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동국(東國)에는 원숭이가 없다”며 “고금의 시인들이 원숭이 소리를 표현한 것은 모두 틀렸다”고 옛 기록까지 깎아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수입 원숭이’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중환(李重煥·1690∼1756)의 ‘택리지’에 나오는 글이다.

“명나라 장군이 철갑을 입은 기병 4000명 사이에 원숭이 수백 마리를 숨겨 놓았다. 왜군이 100보 앞으로 다가오자 원숭이를 갑자기 풀어놓았다. 왜군은 사람 같으면서도 사람이 아닌 원숭이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군이 마침내 혼란에 빠지자 기병이 공격했다. 왜군은 총 한 번 화살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들에는 왜군의 시체가 가득했다.”

왜란 때 명나라 군사가 원숭이를 무기(?)로 사용했다는 기록이다. 몇 달 전,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이 ‘원숭이 군대(猿兵)’가 실제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라는 논문이다. <2018년 9월 6일 한국일보>

‘원숭이 군대’는 명나라 이전인 송나라 때에도 등장했다. 휘종 5년(1115), 안주(晏州)라는 곳에서 ‘복루’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나라에서 ‘조휼’을 초토사로 임명, 파견했다. 그러자 복루는 ‘윤박대돈’이라는 산에서 농성을 하며 저항했다. 그 높이가 수백 길이어서 ‘난공불락’이었다.

조휼은 산골 출신 부하들을 고향으로 보내 원숭이 수십 마리를 잡아오도록 했다. 그 원숭이 등에 횃불을 묶어서 풀어줬다. 불은 순식간에 반란군 진영을 태웠고, 그 혼란을 틈타서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얘기다.

조선 후기에는 원숭이가 구경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원숭이를 길들여 조련하는 사람인 ‘농후자(弄猴者)’가 ‘원숭이 서커스’를 공연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원숭이는 우리 ‘국력’이 왕성할 때는 많았다가, 갈수록 오그라들고 있었다. 그런 결과 오늘날 원숭이는 ‘귀한 짐승’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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