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고려왕릉을 통해 조명한 역사와 문화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조선왕릉과 달리 고려왕릉의 실물을 보기란 정말 어렵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개경)이 북한 쪽에 자리하고 있어, 개성 인근에 묻힌 고려왕릉에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체 조선왕릉 42기 중 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齊陵)’과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후릉(厚陵)’도 현 개성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가운데 제릉과 후릉은 빠져 있다. 분단이 만든 역사의 아픈 한 장면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고려왕릉의 대부분이 개성에 자리하고 있기에 그동안 금단의 영역처럼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간 고려왕릉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기 어려웠다.

고려 희종의 ‘석릉(碩陵)’ ⓒ김희태
고려 고종의 ‘홍릉(洪陵)’ ⓒ김희태

그럼에도 일부이긴 하지만 고려왕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강화도의 고려왕릉과 고양, 삼척에 전해지는 공양왕릉 등이다. 이 가운데 현재 강화도에서 확인되는 고려왕릉은 크게 고종의 ‘홍릉(洪陵)’, 희종의 ‘석릉(碩陵)’, 원덕태후 유씨의 ‘곤릉(坤陵)’, 순경태후 김씨의 ‘가릉(嘉陵)’ 등 총 4기가 남아 있다.

고려왕릉은 왜 강화도에 조성이 되었을까? 이는 무신정권과 대몽항쟁의 영향으로 봐야 하는데, 우선 희종(재위 1204~1211)의 경우 최충헌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면서, 역으로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한편 대몽항쟁을 거치며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게 되는데, 이 시기를 ‘강도(江都)’ 시기로 명명하고 있다. 이처럼 강화도에 도읍했을 때 고종(재위 1213~1259)과 희종, 원덕태후 유씨, 당시에는 태자비였던 순경태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 강화도에 왕릉이 조성된 배경이 됐다.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태후 유씨의 ‘곤릉(坤陵)’ ⓒ김희태
순경태후 김씨의 ‘가릉(嘉陵)’, 70m를 더 올라가면 능내리 석실분을 볼 수 있다. ⓒ김희태

<고려사>를 비롯해 최근의 연구 자료들을 보면 강화도에 4기의 고려왕릉 외에 다른 고려왕릉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운데 고종의 아버지인 강종의 ‘후릉(厚陵)’과 희종의 비인 성평왕후(=함평궁주) 임씨의 ‘소릉(紹陵)’이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그 위치가 밝혀진 바는 없다. 또한 태조 왕건의 ‘현릉(顯陵)’을 비롯해 왕건의 아버지 왕융의 ‘창릉(昌陵)’ 재궁이 강화로 옮겨져 왕릉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현릉과 창릉은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개경으로 옮겨져 조성이 되었으므로, 지금은 강화도에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강화도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고려왕릉이 있을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왕릉급의 고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이 ‘능내리 석실분(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8호)’과 ‘인산리 석실분(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7호)’이다.

■ 가릉과 함께 주목해야 할 능내리 석실분

우선 능내리 석실분이 위치하고 있는 지명이 재미있다. ‘능내리(陵內里)’는 능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능은 가릉을 이야기하며, 가릉은 원종의 태자비이자 충렬왕의 어머니가 되는 순경태후 김씨의 능이다. 가릉에 묻힌 감이 없지 않지만, 능내리 석실분은 가릉과 함께 주목해야 할 장소다. 위치상 가릉에서 불과 70m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발굴이 되기 전 이미 봉토와 석실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왕릉급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능내리 석실분 ⓒ김희태
배면에서 바라본 능내리 석실분 ⓒ김희태
능내리 석실분, 정자각의 배전 터 ⓒ김희태

능내리 석실분의 현 모습은 발굴조사 이후에 복원이 된 경우로, 석실분은 크게 4단 축대로 조성되었다. 전체 규모로 보면 남북 40m, 동서 너비가 22m로 외형적인 형태로만 보면 마치 고려 고종의 홍릉과 원덕태후 유씨의 곤릉과 유사하다. 이 가운데 4단에서 확인된 정자각의 배전 터는 별도의 제향 공간이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한편 능내리 석실분의 경우 명확하게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릉급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부에서 능내리 석실분에서 출토된 ‘은제도금 유물’을 두고 피장자가 남성보다 여성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희종의 비인 성평왕후 임씨(?~1247)나 고종의 비인 안혜태후 유씨(?~1232)로 보는 견해가 있다.

능내리 석실분의 난간석과 석수 ⓒ김희태
능내리 석실분에서 출토된 도기호 ⓒ김희태

 

능내리 석실분의 1단에는 봉분이 자리하고 있는데, 봉분 아래 석실이 있으며, 12각의 호석과 12매의 난간석이 확인되었다. 현재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난간석이 설치된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만들어진 <조선고적도보> 속 강화 홍릉의 사진 속에 봉분의 주변으로 장대석이 노출된 것을 볼 수 있어, 난간석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강화 홍릉에는 이때 쓰인 것으로 보이는 석주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봉분의 뒤로 석수 1쌍이 자리하고 있다.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석수가 등장한 사례는 가릉과 발굴조사를 통해 석수의 머리 부분이 출토된 곤릉이 있다. 이와 함께 능내리 석실분의 동, 서, 남, 북 기단 아래에서는 ‘도기호(陶器壺)’가 출토되었다. 이는 일종의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왕릉급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인산리 석실분

능내리 석실분과 함께 왕릉급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인산리 석실분이다. 인산 저수지가 있는 인산 삼거리에서 외포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첫 이정표에서 인산리 석실분까지는 1.2km로 이정표는 나름 잘되어 있지만, 접근성이 좋지 못한 점은 흠이다. 또한 퇴미산(=퇴모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주차장이나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은 기대하기 힘들다. 대개 고려왕릉의 경우 산의 중턱을 경사지게 만들어 축대를 쌓는 특징을 보인다. 쉽게 강화 홍릉이나 곤릉, 능내리 석실분을 떠올리면 된다. 이런 점에서 인산리 석실분 역시 고려왕릉의 특징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인산리 석실분, 처음 마주하게 되면 돌들이 흩어진 무질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김희태
축대였음을 알 수 있는 흔적, 자연석을 인위적으로 쌓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인산리 석실분을 처음 마주하게 되면 돌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종종 강의 때 인산리 석실분의 사진을 보여주고 “어떤 형태의 고분일까요?”라고 물어보면, 많이 나오는 대답 중 하나가 적석총이다. 분명 아무런 정보 없이 외형만 봤을 때는 적석총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강화 홍릉과 곤릉, 능내리 석실분의 사진을 보여주면 그제야 강의를 듣던 사람들도 아~하며 돌의 정체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무질서하게 흩어진 돌들은 바로 축대의 흔적으로, 실제 고분군의 좌우 끝 쪽을 보면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축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최상부에 위치한 석실, 이미 오래전 도굴된 듯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김희태
석실의 내부 모습 ⓒ김희태
배면에서 바라본 인산리 석실분의 전경 ⓒ김희태

안내문을 보면 인산리 석실분의 전제적인 외형은 3단 축대로 조성이 되었으며, 가장 최상부인 1단은 봉분이 있었던 자리다. 그런데 봉분은 사라진지 오래고 현재 석실이 노출되어 있다. 이미 오래전 도굴이 된 듯 내부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다.

인산리 석실분에 대한 자료는 많지가 않다. 이는 아직까지 정식 발굴조사가 된 고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지표조사만 진행이 되었기에 향후 발굴조사를 통해 석물과 피장자와 관련이 있는 유물의 출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따라서 밝혀진 4기의 고려왕릉 이외에 왕릉급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능내리 석실분과 인산리 석실분은 주목해야 할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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