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주의 혜윰 행]

[오피니언타임스=최미주] 언젠가 귀여운 중3 학생 커플이 찾아와 왜 자신들 이름은 글에 실어주지 않느냐고 입을 삐죽거렸다. 은혜와 준혁. 이 아이들은 같은 학교 공식 커플이다. 준혁이는 은혜가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지하철역을 지키고 있다. 그 시간에 영어 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지 라는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시험기간에도 날이 궂으면 혹여 비라도 맞을까 한달음에 달려오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바치는 준혁이가 그만큼 대견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은혜의 단짝 보민이도 같은 학원, 옆 학교 종익이와 소꿉장난을 시작했다. 둘의 교제가 혹시 공부에 지장을 줄까 반을 분리해도 소용없었다. 종일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일거수일투족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한 학생 제보에 따르면 또래들끼리 통화 시간을 재며 사랑 크기를 자랑하던 일이 유행하던 때 둘은 일부러 통화 중인 채 잠들기도 했단다. 아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양으로 환산하기 위한 나름의 척도를 찾은 셈이다.

ⓒ픽사베이

그런데 요즘 들어 종익이 얼굴이 심상찮다. 풀이 푹 죽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지 않는다. 주변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보민이가 다른 남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질투가 났단다. 짜증을 내면서도 언제나 보민이는 꿍한 종익이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둘의 ‘질투-싸움-화해’는 자주 반복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웃음과 마음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야 백번 이해한다. 머리로는 참아야지 하면서도 마음은 질투로 부글부글 끓는 그 심정을 나도 겪어 봐서 잘 아니까. 하지만 이제 고등학생이 될 텐데 감정에 치우쳐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화법 시간에 배울 내용이라는 명목으로 레이코프의 적절한 거리 유지의 원리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은 독립성과 연관성이라는 상반된 욕구를 가지고 있다. 독립성의 욕구는 너희가 엄마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간섭받기를 꺼려하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족을 찾는 건 연관성의 욕구 때문이다. 연관성의 욕구는 모든 일을 친한 친구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다. 가끔 집에 혼자 있어 외로운데 그렇다고 딱히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건 인간이 이 두 가지 욕구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고슴도치 이야기도 덧붙였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 커플이 추위에 떨고 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둘이 꼭 안고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서로가 가시에 찔려 아프지 않겠느냐. 따라서 고슴도치는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도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를 ‘적절한 거리 유지의 원리’라고 한다. 너희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혹시 자신의 욕심 때문에 옆 친구를 가시로 찌르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좋아하는 오빠가 메시지를 빨리 안 읽는다고 자주 울던 도경이가 손을 들고 이야기했다.
“고슴도치가 서로 좋아하긴 해요? 그러면 둘은 평생 못 안아요? 가시가 닿는 부분만 피해서 안으면 안 돼요?”

이어서 보민이가 말했다.
“좀 찔리면 어때요,”

힘들 줄 알았던 도경이와 보민이가 생각보다 덤덤했다. 아이들에겐 아직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문득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며 준혁이처럼 나의 모든 시간을 쏟아냈던, 종익이처럼 이별의 두려움 없이 질투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어른이란 존재는 왜 늘 타인과 적절한 거리 유지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꾹 눌러야만 할까.

최근 들어 제일 소중해 함께하고 싶은 것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근처를 빙빙 도는 습관이 생겼다. 겁 없이 덤비다 찔린 가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똑같은 상처를 입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꿈, 사랑, 소중한 것들의 가시는 또 왜 그렇게 굵고 강력한지.

사실 가시에 찔려 아픈 것보다 더 무서운 건 나에겐 찔린 가시를 뺄 치료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상처가 났든 말든 우린 사회로부터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연 도태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모든 시간을 그동안 박힌 가시 빼는 일에 쓰고자 한다. 크건 작건 가시에 찔려 아파했던 모든 사람들이 한 해 동안의 상처를 정리하고, 새해엔 조금이나마 덜 아프길 간절히 바란다.

최미주

일에 밀려난 너의 감정, 부끄러움에 가린 나의 감정, 평가가 두려운 우리들의 감정.

우리들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감정동산’을 꿈꾸며.

100가지 감정, 100가지 생각을 100가지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쪼꼬미 국어 선생님.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